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사랑하려는 말테의 수기

koala초코 2012. 1. 22. 13:18
 그랬다. 나는 이 책을 읽어보려고 한번 시도한 때가 있었다.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는 기억이 불명확하다. 제목에서 풍기는 '문학소녀스러운 느낌'에 끌려 책을 집어들고는 딱 한페이지 읽고 즉시 반납했다. 아직은 이 책을 읽을 때가 아니었다.
 시간은 흘러 이 책을 읽어도 되는 시기가 다가왔다. 누구나 이름은 들어봤을법한 시인 릴케의 소설은 나와 책의 약속시간이 적절했는지 유려하게 잘 읽혔다. 시인다운 문장들에 감탄하기도 했다(17쪽, 길게 이어진 화단의 꽃들은 저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며 깜짝 놀라는 목소리로 '빨강'하고 말했다.). 고독한 파리의 초상에 쓸쓸해지기도 했다. 사물의 내면까지 '보려고'노력하는 시인의 태도에 진지해져 보기도 했다. 다른 이들에게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지만, 내게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12쪽, 이를테면 나는 이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얼굴이 있는지 말이다. 이 세상엔 사람도 많지만 얼굴의 수는 그보다 훨씬 많다. 사람마다 얼굴을 몇 개씩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같은 얼굴만 달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다 보면 얼굴은 닳고 너절해지고 주름투성이가 되어 여행하며 줄곧 끼고 다녔던 장갑처럼 헐렁해지기 마련이다. 이 같은 사람들도 인색하고 단순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얼굴을 바꾸지도 않으며 단 한 번도 얼굴을 씻는 법이 없다. 그대로가 좋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어찌 반대의 것을 보여 줄 텐가? 물론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그들 역시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 나머지 얼굴들은 어떻게 할까? 나머지 얼굴들을 그들은 고이 간직해 둔다. 자식들에게 넘겨줄 모양이다. 아니면 그들이 기르는 개들이 그 얼굴들을 쓰고 외출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안 될 까닭이 있나? 얼굴은 얼굴일 뿐인데.
 또 다른 사람들은 겁날 정도로 빠르게 얼굴을 이것저것 바꿔 달아서 금세 해어지게 한다. 그들은 처음에는 얼굴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십이 안 되어 어느새 마지막 얼굴이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얼굴을 아낄 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의 마지막 얼굴은 일주일이 채 안 돼 너절해져 구멍이 숭숭 뚫리고 곳곳이 종이처럼 얇아진다. 그러다가 점차 밑바닥이 드러난다. 그러면 얼굴도 아닌 것이 나오고, 그들은 그것을 달고 돌아다닌다.


15쪽, 자기만의 죽음을 갖겠다는 소망은 이제는 점점 더 진귀해지고 있다. 조금만 더 지나면, 그런 죽음은 자기만의 삶만큼이나 드물어질 것이다. 아, 이젠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다. 사람은 이 세상에 나와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삶을 찾아서 걸치기만 하면 된다.

49쪽, 가장 인상적인 것은 벽들 그 자체였다. 이 방들의 끈질긴 삶은 아무리 밟혀도 사라지지 않았다. 삶은 끈질기게 그곳에 남아 있었다. 삶은 그곳에 아직 남아 있는 못들에도 달라붙어 있었고, 손바닥만큼 남은 방바닥에도 엉겨붙어 있었으며, 안쪽 공간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귀퉁이에까지 기어들어 가 있었다. 삶은, 해마다 천천히 삶과 함께 변해 간 색깔 속에도, 그러니까 파란색에서 곰팡이 슨 초록색으로, 초록색에서 누런색으로 그리고 누런색에서 썩은 내 나는 김빠진 듯한 낡아빠진 흰색으로 변해 간 그 색깔 속에도 배어 있었다. 그러나 삶은 거울이나 그림 또는 옷장 뒤쪽의 손이 덜 탄 곳에도 남아 있었다. 삶은 그런 물건들의 틀을 따라 윤곽을 그려놓고서 그 은밀한 곳에 거미와 먼지들과 함께 숨어 있다가 이제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긁힌 자국투성이의 줄무늬마다 삶이 있었고, 벽지 아래쪽의 습기로 물방울처럼 불어난 곳에도 삶은 있었으며, 찢긴 벽지 조각들 틈에서도 삶은 나부꼈고, 이미 오래전에 생긴 지저분한 얼룩들에서도 삶은 배어 나왔다.


154쪽, 그래, 그렇다. 이 세상에 상상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전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세세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상상하다 보면 서둘게 되어 이런 낱낱의 것들을 지나치게 된다. 그것들이 빠진 것도 모른 채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느리게 움직이며 이루 말할 수 없이 세세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227쪽, 너희의 일기장을 뒤로 넘겨보라. 매년 봄이 되면, 싹트는 새해가 너희를 나무라던 때가 늘 있지 않았던가? 너희는 왠지 마음이 들뜰 때가 있었다. 그래서 들판으로 나가 보면 오히려 바깥공기에서 당혹스러움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그러면 너희의 걸음걸이는 마치 갑판 위를 걸어가는 것처럼 불안스러웠다. 정원은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희는(그래 바로 그거다) 겨울과 묵은해를 정원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간다. 그러니까 너희는 봄을 그냥 시간의 연속 정도로 생각했다. 너희의 영혼이 새봄과 함께 하기를 기다리다가 너희는 갑자기 사지가 무거워져 혹시 병이 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너희는 그게 다 옷을 너무 얇게 입어서 그런 거라 생각하고 어깨에 숄을 질끈 동여매고서 가로수 길 끝까지 내달렸다. 그런 다음 너희는 심장을 펄떡이며 둥근 꽃밭 가장자리에 서서 이 모든 것과 하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어디선가 해가 울었다. 새는 혼자였다. 그리고 너희와는 상대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 너희는 진작 죽어야 했나?


240쪽, 사랑받는다는 것은 불타서 사라지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기름으로 밝게 빛나는 것이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지속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