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우엘벡의 백과사전적 서술에 대하여

koala초코 2012. 4. 30. 18:21

 드디어 유명하다면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벡의 작품을 한 권 읽는 데 성공했다. 공쿠르 상 수상작 [지도와 영토]로 시작점을 찍으니 산뜻하고 예술적이다. 우엘벡을 화제의 작가로 만든 특유의 주제의식과 백과사전적 지식의 짜깁기 방식에도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주인공이 벤츠를 타고 가면서 벤츠에 대한 지식과 소비 방식을 나열하는 서술방식은 확실히 특이하다.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를 보여주는 방식의 하나로써 '콜라주' 형식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겠다.

 이런 서술방식이 뜻밖의 유머로 터져나온 장면이, 주인공 제드 마르탱이 초상화 작업을 위해 미셸 우엘벡을 찍으러 삼성 카메라를 사서 그 설명서를 읽는 부분이다.


 194쪽, 2010년대의 소비자가 좋아라 할 만한 가장 좋은 방법은 한국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동차로는 기아와 현대가 있고, 전자제품으로는 엘지와 삼성이 있다.

 사용설명서의 머리말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ZRT-AV2 카메라는 브랜드 특징으로 정평이 나 있는 전설적인 용이한 사용법과 가장 창의적인 기술 혁신-예를 들면 스마일 셔터 기능-이 만나 탄생했다.

 한껏 고양된 이 도입부를 지나고 나니 나머지는 보다 기능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제드는 대충 훑어보며 꼭 필요한 정보만 찾아 읽었다. 분명 이 제품의 콘셉트는 체계적이고 광범위하며 획일적인 낙관주의였다. 하이테크놀로지 제품의 흔한 콘셉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경향이 필수는 아닐 터인데. 예컨대 '장면모드'의 목록에 '불꽃놀이, 해변, 아기1, 아기2'대신, '장례식, 비 오는 날, 노인 1, 노인 2'를 포함시켰어도 전혀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아기1'은 뭐고, '아기2'는 뭐지? 설명서의 37페이지에 이르러 의문이 풀렸다. 이것은 사진에 각기 다른 두 아기의 나이가 표시될 수 있도록 생년월일을 따로 설정하는 기능이었다. 38페이지에는 아기의 피부를 '건강하고 생기 있게' 재현하는 기능이 설명되어 있었다. 실제로 아기1과 아기2가 생일 사진에 초췌하고 누렇게 뜬 얼굴로 나온다면 부모의 낭패감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한국 전자제품 특유의 '감성 마케팅'을 소재로 한 블랙 유머에 의외의 실소가 터져나왔다. 이밖에도 우엘벡만의 유머 감각은 작품 여러 곳에 심어져 있다고 '하는데', 프랑스 문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미천한 나로써는 모든 맥락을 다 이해하고 함께 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백과전서식 서술 방법의 효과와 필요성에 대해 나름대로는 이해할 수 있었달까. 그건 점점 더 세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 힘들어지는 이 시대 나름대로의 리얼리즘적인 방식은 아닐까, 잠깐 생각해보았다.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은 물건과 지식이 쌓여있는 한가운데 하나하나 그 근원을 탐색하고 주워삼기며 스크랩북에 붙이는 한 소설가를 떠올려 보라. 확실히, 그는 내 독서 취향에 알맞는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