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

koala초코 2012. 6. 24. 13:53

소립자 - 10점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열린책들

 

 

25쪽, 어떤 물고기가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이따금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다고 할 때, 그 물고기는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몇 초 동안 무엇을 보게 될까? 수중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공기의 세계, 천국 같은 세계를 보게 되지 않을까? 물론 그러고 나면 물고기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해초의 정글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물고기는 다른 세계, 어떤 완전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감하지 않았을까?

 

 제목에서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한 소설이면서도, 예상한 그 이상의 지평선을 보여 주는 소설.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적 설명과 20세기 말 서구사회의 성 풍속도가 뒤얽히면서 진행되는 소설은 SF적인 결말로 끝맺는다. (스포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인류는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고 스스로 소멸한다. 이 신인류가 만들어지게 된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과학자 미셸 제르진스키를 기념하며 신인류가 쓴 책이 바로 이 [소립자]란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 신인류의 탄생에 얽힌 공상과학적인 스토리가 주가 될 것 같지만, 소설은 미셸의 아버지가 다른 형 브뤼노의 성 탐구여행의 묘사를 중점적으로 자세히 다룬다. 각종 포르노 산업에 둘러싸인 현대 사회에서 브뤼노는 진정한 결합을 꿈꾸지만 그 속에 사랑은 없다. 중년의 나이에 겨우 만난 크리스티앙과의 만남은 그녀의 하반신 마비와 이에 따른 자살로 끔찍하게 끝이 나고, 그는 정신병원에 들어가버린다. 아예 진정한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 느끼지도 못했던 미셸은 어릴 때부터 친했던 아나벨과 재회하면서 사랑의 이미지를 얻게 된 순간, 자궁암과 이로 인한 절망으로 아나벨이 자살하게 되면서 역시 그녀를 잃게 된다. 두 주인공의 연인들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스토리를 여성주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자. 이 형제의 불행한 사랑의 종말을 통해 소설은 지금의 인류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니까. 아나벨과의 관계과 형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제르진스키는 진정한 사랑을 아는 새로운 종의 탄생을 예언하며 그 역시 자살한다. 그는 저 물고기처럼 물 밖의 새로운 세계를 보았던 것일까?

 

324쪽, 자연에 나타나는 형상들은 인간이 지어내는 형상들이다. 삼각형이나 얽혀 있는 모양이나 나뭇가지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 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늠한다. 우리는 그것들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인간이 지어내고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는 창조물들 속에서 성장하다가 죽는다. 우리는 인간적인 공간 속에서 측량을 하고 그 측량을 통해 우리의 도구들 사이에 공간을 창조한다.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은 공간을 생각하면서 공포에 떤다. 그들은 공간을 거대하고 캄캄하고 텅 빈 것으로 상상한다. 그리고 존재를 이 공간 속에 고립된 채 웅크리고 있는 하나의 공 같은 형태로 상상한다. 3차원의 영원한 무게에 짓눌려 있는 하나의 형상으로 말이다. 사람들은 공간이라는 관념에 겁을 먹고 옹송그린다. 그들은 추위와 공포를 느낀다. 최선의 경우에는 공간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공간의 한복판에서 서로 슬프게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공간은 그들의 내면에 있고 그들 자신의 정신이 지어낸 것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들이 두려워하는 그 공간 속에서 사는 법과 죽는 법을 배운다. 그들의 정신이 지어내는 공간 속에서 분리와 거리와 고통이 생겨난다. 하지만 더 설명할 필요 없이 분명한 사실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바다 건너 산 너머에서 자기 연인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어머니는 바다 건너 산 너머에서 자기 아이가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사랑은 존재들을 결합시킨다. 영원히 하나가 되게 한다. 선행은 존재와 존재를 묶어 주고 악행은 존재와 존재를 이간시킨다. 분리란 악의 또 다른 이름이다. 분리란 거짓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름답고 거대하고 상호적인 얽힘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새로이 태어난 종은 어떤 모습의 무슨 속성을 가지는가? 이에 대해 작가는 명확히 묘사하진 않았다. 다만 그들은 빛을 알고 진정한 결합을 아는 우리의 꿈 속에서 태어난 자들이라는 것,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던 어떤 존재임을 에필로그에서 암시할 뿐이다. 중요한 건 이런 종을 만들 수 있는가 마는가의 사실 여부의 확인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 없이 쾌락적 접촉만이 횡행하는 이 세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중요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