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한 권의 책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koala초코 2012. 9. 22. 23:20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10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동녘

 

 

 

 

 솔직히 고백한다.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알라딘 노트 사은품이 탐나서였다고. 다소 불순한 이 구입동기는 나에게 뜻밖의 지적 자극을 안겨주었다. 25년생의 폴란드 노학자는 87년생 한국인 꼬꼬마에게 이 시대를 보는 관점을 제시해주었다. 새 안경을 맞추듯.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로, 이정표는 커녕 당장 걷고 있는 길 자체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버리는 변화의 세계. 울렁거리는 유동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메슥거리는 멀미를 가라앉히기 위해 sns중독에 빠지거나, 종교에 매달리거나, 미친듯이 쇼핑을 한다. 어디로 가야 하나 길조차 알 수 없는 세계, 막연한 공포에 대한 공포(포보포비아)에 시달리는 세계, 수많은 페친 트친을 가졌지만 이상하게 점점 더 고독해져만 가는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그 답은 각자 이 책 속에서 읽어내 보시길...

 

19쪽, 방금 나는 얼핏 보기에 친숙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는 인상 때문에, 그 친숙한 일들에 관해 어떤 새로운 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 또한 하나의 착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착각에 빠지는 것은 바로 그 친숙한 것들이 너무 가까이 존재하기 때문에 도리어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언제나 거기 있어서', '결코 변하지'않을 듯이 '바로 가까이에 있는 사물들'만큼 아주 재빠르고 단호하면서도 면밀한 음미의 눈길을 피해가는 것도 없다. 친숙한 것들은 바로 '빛 속에 숨어'있는데, 결국 그 빛은 친숙함 속에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오해하게끔 하는 빛이다! 그러한 친숙한 사물들의 평범성은 모든 음미의 눈길을 방해하는 장막인 셈이다. 그처럼 친숙한 사물들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면밀한 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각적으로 무디고 아늑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타락한 판에 박힌 듯 순환하는 일상으로부터 그 사물들을 뜯어내서 분리시켜야 한다. 우선 그 사물들을 적절히 이해할 수 있도록 스캐닝하기 전까진 반드시 무시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그 사물들이 지닌 소위 '일상성'이라는 조심스러운 장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친숙한 사물들이 숨기고 있는 풍부하고도 심원한 미스터리를 탐구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다. 사실 당신이 그 친숙한 사물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곧 그 사물들은 아주 기묘하고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돌변할 것이다.

 

31쪽,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51쪽, 이제 언젠가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그 유명한 '존재 증명'의 명제는 우리들의 이 매스커뮤니케이션 시대에 맞게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된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밀려 쫓겨나버리고 말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 볼수록, 즉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선택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주는 증명처럼 여기게 되는 셈이다. 바로 이러한 삶의 양식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람들이 유명인들이다.<트위터, 혹은 새들처럼>

 

122쪽, 바꿔 말하면 우리는 소비 행위와 우리 자신들의 다른 삶 사이를 구별하던 구분선이 점진적으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우리 시대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요리하려던 수프의 재료가 부족하거나, 낡은 구두를 새 구두로 바꾸려는 등의 일반적인 이유보다 상점을 자주 찾으려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세속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오히려 보다 더 숭고한 이유 말이다. 오늘날 모든 길은 그 어디나 상점으로 이어져 있다. 또 적어도 우리는 날마다 그 어떤 경우에든 그렇다는 것을 익히 듣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매일 이런 식의 광고를 듣는다. 남들과 함께 어울리며 당신의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으신가요? "만약 다른 사람들이 없다면, 삶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최신형 휴대전화 광고는 마치 그 새로운 브랜드의 휴대전화 제품이 단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간편한 수단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 삶에서 그 어떤 중요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게 해주는 기계장치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시키려 한다. 또 다른 광고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가장 잘 말해 주는 것이 바로 당신의 시계입니다."라고 떠벌리면서,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든 바라봐주고 자신들이 그들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든 '소비되길'원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방법을 찾으려 열광적으로 몰두하는 우리 모두에게 말을 건넨다. 새로운 자동차 디자인에 관한 한 광고는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말하면서 이와 같은 모든 제안과 약속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 준다. '당신은 자동차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의 일부분을 구입하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서 넌지시 암시되는 그 일부분이라는 것은 당신 자신의 가볍고 사소하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어떤 일부분의 '조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공식적인 얼굴, 곧 당신이 이 세상과 접속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눈에 비춰진 당신의 이미지를 말하는 셈이다.<아이가 아닌 아이>

 

210쪽, 결국 성공하는 비법은 '나머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비슷해지는'데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 자신만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달려 있다. 최고로 잘 팔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차이이지, 동일함은 아닌 것이다. 이제는 전적으로 '그 직업에 속한다고 여겨지는'지식이나 기술, 또는 이전에 그 일을 했거나 지금도 그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입증된 지식이나 기술들만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마 이러한 지식이나 기술들은 오히려 약점처럼 여겨지게 될 것이다. 그 대신 필요한 비법은 바로 '그 어떤 누구와도 같지 않은'특이한 생각들과 그 어떤 누구도 결코 이전에는 제안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이례적이며 우수한 기획들, 또한 그 무엇보다도 마치 고양이처럼 자기 혼자 잘 지내면서 홀로 자기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그러한 성향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이 유동하는 근대 시대의 사람들 모두가 갈망하는 지식이자 모두가 갈망하는 영감인 셈이다. 유동하는 근대 세계를 살아가는 그들 모두는 반드시 오직 한 가지 길만을, 곧 '한 가지 유일한'길이기 때문에 이미 너무나 붐비는 그러한 길을 따라가라고 가르치는 선생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상담전문가를 원한다. 유동하는 근대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상담전문가는 바로 개개인의 성격과 개성을 깊이 파고들어가 그 속에 발굴을 기다리는 귀중한 광석이 묻혀 있는 풍부한 매장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이들은 금액이 얼마가 되었든 이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상담전문가에게 기꺼이 상담받을 것이다. 그런데 상담전문가들은 정작 의뢰인들의 무지함이 아니라 태만하거나 게으른 점을 비난할 것이다. 다시 말해 상담전문가들은 전통적인 교육자들이 자기 제자들에게 전하길 원했고 또 전수하기 용이했던 앎을 '터득해가는' 지식보다는 오히려 실용적인 지식이나 처세술 같은 지식들을 '터득하는 방법'을 조언할 것이다.<교육을 환대하지 않는 세계?>

 

250쪽, 분명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많은 것들이 부족하거나 공급이 딸리지만, 그럼에도 그와 같은 걱정들 중에서 그처럼 심각한 문제를 예상해야 할 만큼의 신뢰할 만한 근거들을 갖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그 정도만 다를 뿐 포보포비아(공포에 대한 공포증)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하게 타당한 일일 것이다. '포보포비아'라는 이 용어는 하몬 레온이 최근에 새로 만들어낸 신조어인데, 여러 가지 공포들(포비아들)에 대한 공포증(포비아), 다시 말해 공포들에 대한 공포를 뜻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를 오랫동안 괴롭혀온 것은 실상 템포가 빠르고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서 도저히 예측할 수 없기에 여러 유혹들과 위험들이 들끓고 있는 이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인 바로 우리 자신들이 느끼는 그 두려움 자체에 대한 공포인 셈이다.

 

374쪽,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아니면, 로마의 시인 루칸이 사랑에 관해 남긴 아주 기억할 만한 의견까지 동원하자면,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사랑하는 일처럼 운명에 인질로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삶이란 정말 불쾌하고 불안하며 심지어 무서운 것일까? 사실 그럴 것이다. 더구나 틀림없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정말 곤란한 문제는 살아가는 일에는 또 다른 인생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미셸 푸코가 주장했던 것처럼,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인생에 여행일정표를 창조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 여행일정표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들도 또한 창조하기 마련이다. 마치 예술작품들이 예술가에 의해 창조되는 것처럼 말이다. 인생의 과정과 인생의 '전반적인 목적',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지'도 단지 '자신 스스로가 찾아야만 하는 일'이며, 이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에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모두 인생의 예술가들이다. 더구나 자신들이 원해서 선택했다기보다는 보편적 운명의 법칙에 따라 그러한 인생의 예술가로 살아야 하는 셈이다. (...중략...)인생이란, 더구나 그것이 만일 한 인간의 삶이라면, 결코 예술작품이 아닐 수는 없는 법이다. 말하자면 한 인간의 삶이라면, 곧 의지와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은 존재인 인간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