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koala초코 2012. 9. 28. 22:29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10점
김연수 지음/자음과모음


 김연수의 소설을 좋아한다. 특유의 사색적 문장을 좋아한다. 좋아서 친구들에게 추천하면, '잘 모르겠다'는 애매한 답을 돌려준다. 몇 번 돌려받은 답신 끝에 그의 소설을 추천하는 건 그만두었다. 그러나 이번 소설만큼은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다. 이번 작품은 그만의 사색이 서사와 균형을 제대로 이룬다. 자신의 근원-부모 찾기라는 보편적인 문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이야기가 술술 잘 읽혔다. 어머니 찾기는 아버지 찾기로, 주인공 카밀라 포트만의 탄생에 얽힌 진실 탐구로 서사의 강은 거침없이 흘러간다. 그렇다면 카밀라는 왜, 이전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그랬듯이 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가?


100쪽, 거기까지 말하고 신혜숙은 전화를 끊었다. 그녀에게 선의가 있는지, 악의가 있는지 목소리만으로는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긴 해도 마지막 말에 그녀의 진심이 담겼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진심 같은 단어를 입에 담는 내 모습은 스스로도 좀 낯설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이야기의 진실을 찾아 어둠의 핵심까지 들어가는 캐릭터를 볼 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저들은 왜 저토록 간절하게 진실을 추구하는 것일까? 공익을 위해서? 스스로 충만한 삶을 원하니까? 공명심 때문은 아닐까? 이제 내가 그런 입장이 되어보니 중요한 건 진실 그 자체이지, 개개인의 삶이 아니라는 걸 알겠다. 그들의 욕망은 진실의 부력일 뿐이다. 바다에 던진 시신처럼, 모든 감춰진 이야기 속에는 스스로 드러나려는 속성이 내재한다. 그러므로 약간의 부력으로도 숨은 것들은 표면으로 떠오른다. 진실은 개개인의 욕망을 지렛대 삼아 스스로 밝혀질 뿐이다.


 진실, 희재가 카밀라가 되어 진남 바다 건너 미국 입양아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의 진실. 소설은 명확히 진상을 설명하진 않는다. 어른이 된 카밀라의 엄마 정지은의 친구들을 화자로 진실의 조각을 흩뿌릴 뿐이다. 그 조각들을 천천히 맞춰 나가다 보면 진남의 양관 '바람의 말 아카이브'가 모습을 드러내고, 소설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가령, 지은의 친구 유진이 영화감독이 된 후 인터뷰를 했던 이런 말들,


274쪽, 제 영화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상징은 날개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에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없었을 테지요.


 가질 수 없는 날개를 가졌다 착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그대를 이해했다 오해한 결과가 지은의 자살과 희재의 입양, 그 배경에 그녀를 질투하고 미워했던 친구 미옥의 거짓말이, 미옥의 거짓말 속에 지은과 최성식 선생님과의 관계를 의심했던 신혜숙의 진실 은폐가, 더 나아가 지은과 미옥의 아버지가 죽게 된 진남조선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이 존재한다. 상대의 본심에 가닿지 못하고 심연으로 추락하는 가련한 인간이라는 존재. 희망은 있는가? 그래서 작가는 지은과 희재가 이 시를 함께 읽으며 소설이 마무리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희망은 날개 달린 것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영혼에 둥지를 틀고

말이 없는 노래를 부른다네,

끝없이 이어지는 그 노래를,


드센 바람 속에서도 가장 감미로운 그 노래를.

매서운 폭풍에도 굴하지 않고

그 작은 새는 수많은 이들을 

따뜻하게 지켜주리니.


가장 차가운 땅에서도,

그리고 가장 낯선 땅에서도 나는 들었네.

그러나 최악의 처지일 때도, 단 한 번도,

그 새는 내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지 않았네.


- 에밀리 디킨슨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사족1, 소설의 배경인 항구도시 진남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다. 경상남도라는 설정이던데, 왜 등장인물들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않는 것일까? 이 작품이 카밀라가 소설 속에서 쓰려고 했던 작품을 번역했다는 설정인걸까?


사족2, 소설 속 삽입시는 고전소설 속 삽입시의 기능을 떠올리게 한다. 등장인물의 정서를 전달한다든가, 뭐 그런...


아, 제 2부에서, 화자가 지은으로 등장하는 기법은 신선했다. 처음에는 2인칭 시점인가 했는데, 죽은 엄마가 자기보다 나이가 더 많은 딸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끌어 가니 한층 서사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소설의 제목도 그녀의 독백에서 나온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너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졌지. 그럼에도 네가 영원히 내 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내 안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네가 나왔다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경험인지 네게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입술이 내게는 없네. 네 눈을 빤히 쳐다보고 싶지만, 너를 바라볼 눈동자가 네게는 없네. 너를 안고 싶으나, 두 팔이 없네. 두 팔이 없으니 포옹도 없고, 입술이 없으니 키스도 없고, 눈동자가 없으니 빛도 없네. 포옹도, 키스도, 빛도 없으니, 슬퍼라, 여긴 사랑이 없는 곳이네.(228쪽)

 사람 사이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고, 우리에겐 도저히 말해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지만, 희망은 날개 달린 것, 문학은 말하고 싶지만 말해지지 않는 말을 이야기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