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피비린내나는 빨간 사과

koala초코 2012. 10. 2. 13:40

 

영이 02 - 10점
김사과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24쪽, 아빠가 술을 마시면 엄마는 욕을 하고 아빠는 엄마를 때리고 둘은 싸운다. 한 문장으로 쓰면 될 것을 나는 왜 이렇게 많은 문장을 쓰고 있나. 왜냐하면 백 문장에는 백 문장의 진실이 있고 한 문장에는 한 문장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열 시간의 고통과 십분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백 문장의 진실과 한 문장의 진실은 다르다. 이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광경이기 때문에, 한 문장-삼초의 고통이 아니라 천 문장-삼천 초의 고통을 안겨줘야 한다. 그래야만 당신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읽는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아주 오래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당신은 아주 오래 느껴야 한다. 한번 더 사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오랫동안 말이다. 그래야 영이가 당신 마음속에 오래도록, 영이가 죽고 내가 죽은 뒤에도, '영원히'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이>

 

91쪽, -머지않아 흉한 씨멘트 덩어리는 값비싼 브랜드의 아파트로 완성이 되겠죠. 그러나 내 삶은 여전히 뿌옇게 모호한 채로 남아 있겠죠. 저 빼곡한 창문들 중에 내 것이 될 창문은 하나도 없어요. 나는 저것들 중 어느 하나도 소유하지 못한 채로 그러나 저것들과 함께 늙어갈 거예요. 여기 내가 사는 아파트도 언젠가 빛나는 순간이 있었을 테지만 나는 단 한순간의 빛남도 없이 조금씩 낡아가고 바래가는 것밖에는 없어요. 시간이 지나 천천히 부식이 시작되겠죠. 지금은 해가 떠 있는 시간이라 괜찮지만 곧 밤이 찾아와 해가 지면 천천히 어둠속으로 가라앉을 거예요. 어둠 너머로 뻗을 손은 없겠죠. 내 손은 회색 승용차 아래 깔려 천천히 말라비틀어질 테니까요. 빛나는 것들은 벽에 걸린 옷들뿐인데 그것들도 금세 회색 먼지를 뒤집어쓰고 볼품없어지겠죠. 그래 나는 늙고 추한 할머니가 될 거예요. 저 멀리 놓여 있는 수천개의 아파트들도 언젠가 버려져요. 나처럼요. 내가 가진 것들 내가 먹는 것들 내가 가는 학교 텔레비전 연속극 침대에 깊이 잠이 든 할머니 그리고 옷, 옷들 모 혼방니트 카디건 블랙 미니스커트 레깅스 캐시미어 목도리 씰크로 된 원피스 와인색 빅백들도 모두.....<이나의 좁고 긴 방>

 

197쪽, 검고 뜨거운, 아니 무색무취의 투명한, 유리로 된 작은 구슬 하나가 내 몸속에 들어 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 구슬이 데굴데굴 구르며 날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 구슬이 뭔지 안다. 공포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날 두렵게 하고 그래서 난 화가 난다. 왜냐하면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날 떨게 한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무서워, 무서우면 공포, 공포는 폭력, 폭력은 살인, 살인은 피, 피는 빨개, 빨간 것은 사과, 김사과, 분노, 우리를불안에떨게하고공포를느끼게하며견딜수없은폭력을휘둘러무차별살인을하게만드는이분노의원천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