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고독과 고통의 서사-그것은 태연한 인생

koala초코 2012. 10. 20. 23:52

16쪽, 사랑에 빠진 여인은 생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빛날 것이다. 류의 아버지가 포착하고 전율한 것은 그 아름다움이었다. 그 아름다움은 대개 이미지로 구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서정적 이야기들은 연인의 포옹이나 결혼식으로 끝이 나고그런 것을 해피엔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이후 벌어지는 생활과 이데올로기라는 서사의 세계는 이미지의 세계와 인과관계가 없는 다른 영역이다. 이미지는 순간적으로 쏘이는 광선 같은 것이고 자체로 완결되기 때문에 진위 같은 건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의심하지도 상처받지도 않았다. 빚 같은 것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서사의 영역에 속한 어머니의 삶을 이끄는 것은 이미지가 아닌 패턴이었고 그것은 뜨개질 본처럼 이어져가야만 했기 때문에 절단면의 상처는 깊었다. 그것은 비용을 요구했다. 서사의 세계에 속하지 않았던 류의 아버지는 단독자인 셈이었다. 고독은 피할 수 없었다. 반대로 류의 어머니는 서사의 세계를 택했고 그 부조리함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통을 받아들여야 했다.

 

103쪽, 에피소드에는 속편이 없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일회성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지나쳐가는 수많은 버스들과 비슷하다. 한순간 내 앞에 머무르지만 나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인생의 대부분은 이런 에피소드로 채워져 있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작가는 최대한 에피소드를 배제한다. 인과관계가 없는 우연은 이야기를 이끌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플롯의 고리를 느슨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작가가 보여주려고 하는 세계, 그 세계를 구현하지 않는 에피소드는 여지없이 퇴출된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모두에게 자기 인생의 작가라는 권능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피소드의 형태로 등장하여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버스 가운데 어떤 것이 일회성 우연이며 어떤 것이 내 인생의 플롯으로 가는 노선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을 포착하고 무엇을 흘려보내야 할까.

 

160쪽, 새로운 여자란 마치 티백 속의 마른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붓는 것처럼, 말라버린 채 얇은 종이 속에 갇혀 있던 자신의 존재를 되살아나게 했다. 그리하여 손끝까지 따뜻한 기운이 돌고 향기가 온몸을 채우는 것이다. 상대에게 가까워지고자 하는 의지는 상대와 같아지려는 동기를 유발하는데 그것을 추동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발생했다. 그처럼 낯섦이 자신에게로 옮아오는 변화과정의 이물감이야말로 요셉이 원하는 살아 있는 자의 실감이었다. 남녀관계에서 요셉은 그 시작의 느낌을 가장 좋아했다. 그것은 짧기 때문에 더 강렬했다. 시간이 지나면 패턴이 되어 지겨워지게 마련이었다. 사랑이 식는 것은 반복되는 관계 속에서 상대가 고유성을 잃고 다른 누구와 다를 것 없는 덤덤한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206쪽, 요셉은 정해진 틀 안에서 계급을 나눈 다음 그중 약자로 규정된 자의 편이 되어서 싸우거나 위로한다며 노골적으로 목청을 높이는 감상적이고 진지한 소설들이 지겨웠다. 빈부와 상하관계와 계급이 뒤바뀌면서 이루어내는 신분상승과 인생유전의 서사가 흥미에 만족하지 않고 강렬한 주제의식으로 정의롭게 포장되는 데에 짜증이 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요셉의 생각이 맞는다면 스스로 도덕적이고 정당하다고 믿는 주장일수록 배타적이 되기 쉬웠고 타인에 대한 폭력의 성격을 띠기 일쑤였다. 그것은 노인들의 단체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요셉이 포착하고 싶은 것은 그 단체생활에서 벗어나 있는 고유한 개인이었다.

 

263쪽, 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세상의 끝은 S시가 아니었다. 열정이 끝나는 소실점이었다. 매혹은 지속되지 않으며 열정에는 일정한 분량이 있다. 그 한시성이 그들을 더욱 열렬하게 만든 것이었다. 류는 그들에게 주어진 매혹과 열정의 시간이 끝나버리는 날 자신이 혼자 비행기에 실려 돌아오리라는 걸 예감했다. 요셉과 다른 점은 그것이었다. 둘 다 뜨거웠지만 류는 요셉과 달리 자신을 속이지 못했다. 매혹이 사라진 이후의 사랑은 어머니처럼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틀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류는 자기기만의 부역보다는 상실을 택했다. 고통보다는 고독을 택한 것이다. 그것을 요셉에게 납득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조의를 표하듯 왼쪽 가슴 위에 올려놓았던 팔을 요셉에게로 뻗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만지는 류의 표정에는 슬픔과 갈망이 조용히 깃들어 있었다. 그 여름 S시를 혼자 떠나올 때 류는 울었지만 요셉과의 관계에서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놓고 되돌아와버린 것에 대해 후회하진 않았다.

 

255쪽, 요셉은 낡은 형판으로 상투적인 본을 찍어내는 패턴이라는 권력에 신물이 났다. 그것을 집행하는 자들은 외과의사처럼 누군가 메스와 소독가위를 건네주면 그것으로 환부를 잘라낼 뿐 고통의 고유성에는 관심이 없다. 요셉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존엄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개인의 고유함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고유함이 없다면 인간은 시간이 되면 꺼지는 기계처럼 패턴에 의해 소비될 뿐이다. 패턴에는 매혹이 없었다. 타인이 지겨운 것은 관계를 맺기 위해 그런 패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환멸에는 그나마 고독이 위로가 되었다. 환멸을 완성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염증이었다. 류가 공책에 쓴 것과 달리 어두운 숲을 물려받은 자에게 움직이는 숲을 보는 날은 오지 않았다. 요셉은 검은 보자기로 덮인 어둠 속에서는 노래할 수가 없었다.

 

265쪽 소설 마지막 부분,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흘러갔다. 류는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