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권리/2013_여름 내일로

[0806 내일로8-전주]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

koala초코 2013. 8. 16. 00:05



(다시 찾은 경기전)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습니다

2시 기차를 예매해 둔 지라 게스트하우스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나와

영화 <광해>에 나왔다는 대나무숲을 보기 위해 경기전으로 가 보았습니다



멋지긴 한데, 사진 속의 대나무가 전부입니다

영화 어느 장면에서 나온 거지? 다시 광해를 보고픈 심정

이성계의 어진도 다시 한 번 보고, 어슬렁어슬렁 조금 실망하면서 경기전을 돌아다니다

어진박물관을 발견하고는 들어가 보았습니다




여기 안 갔으면 입장료 아깝다고 울뻔했네요ㅋㅋ

별 기대 없이 입장했는데, 의외로 구성이 알차 꼼꼼하게 둘러보며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경기전이라는 장소의 의미, 어진을 모시는 행차, 전쟁으로부터 이성계의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지키기 위한

전주민들의 노력, 그 덕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경기전에 모셔진 것 하나만 남아 있다고 하네요

다른 조선의 어진도 남아 있는 것이 6편?정도..세종의 어진도 그 당시에 그려진 진품은 아니고 복원된 것이라 합니다

조선왕조의 궁중 복식도 보고 유익한 박물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목적지, 전주 재방문의 가장 큰 이유! 최명희문학관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2010년 겨울 내일로 때 월요일에 전주를 방문하느라 가 보지 못한 곳...

고등학교 때 뭐에 홀린 듯이 한 달 만에 혼불 10권을 완독한 제게 

최명희문학관은 이상하게 저를 자꾸만 끌어당겼습니다





-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것을 딱 한 가지만 말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는 것입니다.


- 말에는 정령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된다고도 하지요. 생각해보면 저는 소설이라는 이야기 속에 말의 씨를 뿌리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씨를 뿌려야 할까. 그것은 항상 매혹과 고통으로 저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고 모국어는 모국의 혼이기 때문에 저는 제가 오랜 세월 써오고 있는 소설 [혼불]에다가 시대의 물살에 떠내려가는 쭉정이가 아니라 진정한 불빛 같은 알맹이를 담고 있는 말의 씨를 심고 싶었습니다.


-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

 남들은 한 번 쓰고 나면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절대 저렇게 하지 못한다. 일필휘지가 갖고 있는 한순간에 우주를 꿰뚫는, 정곡을 찌르는 강력한 힘도 좋지만 천필만필이 주는, 다듬어진 힘이 좋다.

 가장 좋은 것은 일필휘지가 천필만필을 겪으면서 애초보다 더 편안하고 표가 안 나는 것이다. 그러나 고칠 때마다 오히려 때가 묻고 삐걱거린다면 차라리 고치지 않는 게 더 낫다. 

 마치 15년 전에 떨어져 나간 손가락을 주어다가 접합 수술을 하는데 하나도 표 안 나고 잘 붙도록 매 순간 기도하고 전심전력을 기울인다.


- 겨울이니까 삭막한가...? 삭막? 삭막은 아니고 싸늘하잖아요. 적막? 적막하기는 한데 적막만은 아니고...막막한 것도 아니고. 처연인가? 처연은 좀 축축해요. 처연하다, 묵연하다, 적연하다...온갖 '연'은 다 써봤어요. 시험볼 때 줄긋기 있잖아요. 그것처럼. 다 갖다 맞춰보는 거예요. 수십 개를.

 그럼 혹시 '삭연'이라는 말이 있을까, 사전을 찾아보니까 있는 거 있죠.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너무 좋아가지고.

 어느 경우에는 제 몸속에 고여 있던 말이 음악처럼, 금광의 금싸라기처럼 캐내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에는 수학문제를 풀듯이 수십 개를 늘어놓고 조립하기도 하죠. 그것이 맞아 떨어질 때는 정말 황홀하고 아름답고, 이 말을 막 소문내고 싶고.


 개장하자마자 들어와 사람도 거의 없는 문학관을 둘러보며 그녀의 글을 읽고, 영상 속에서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데, 난데없이 눈물이 나왔다.

 영상 보라고 만들어 둔 의자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이상하다. 왜 눈물이 나지. 울고 있는 나 자신에게 당황하면서도 우는 내가 당연하게 느껴졌다.

 이제야 왜 내가 이곳에 와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차를 타기 전 카페에서 다이어리를 정리하며 쓴 문장들입니다.




문학관 바로 옆의 부채 박물관도 보고, 한옥 마을을 다시한 번 더 둘러보면서 들뜬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사실 문학관을 나오고 한옥마을의 전경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계속해서 아른거리는 그녀의 문장들, 귀에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 때문에.

여행의 절정이 노고단이었다면, 여행의 결말을 최명희 문학관이 끝맺어 준 것이죠.

이미 여행은 끝이 났습니다.




끝이 났더라도 밥은 먹어야 살겠죠?ㅎㅎ

전주에서 유명한 분식집, 베테랑 분식에서 칼국수를 시켜먹었습니다.

5000원인데 양 끝내주게 많습니다. 고소하고 맛있어요.

만두도 맛있다는데 어제 국밥에 순대까지 시킨 패기를 또 보여주기엔 곤란해서 

얌전히 칼국수만 먹고 나왔습니다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마지막으로 들어간 찻집 고신

시원한 모과차를 마시며 문학관에서 읽은 문장들을 하나하나 다이어리에 옮겨 썼습니다.

계획했던 인생에서 전혀 다른 방향의 길로 들어선지 일 년,

나름대로 자부심 넘쳤던 일 년의 시간이 문학관에서 그녀와 대면한 순간 미친듯이 부끄러워 졌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이미 모든 것을 이뤘다고 자만했던 일 년의 시간이 아무것도, 어떤 의미도 없었다는 진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에 저는 울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단 하나의 문장, 정확한 문장을 찾아 평생을 어둠 속에서 헤매야 하는 운명을 마주한 채로

한바탕 울고 나니 개운해졌습니다.



(맛있었던 모주 한 세트 사들고 귀가하는 열차 안)


그래요,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아요.

혼자 하는 여행도 결코 함께 하는 여행보다 어렵지 않아요.

여행과 여행 사이 기차 안에서, 숙소 안에서, 잠들기 전, 카페 안에서

대화할 이는 오로지 나 혼자,

다이어리를 펴 들고 내 안으로 파고드는 시간들

그러다 마주치는 같은 여행자들과 웃으며 인사하고 대화하는 순간들

저는 이제껏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혼자 밥을 먹으면 사람들이 비웃고 손가락질 할 것이라는 일종의 피해의식...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었거든요

혼자 걸어다니고 밥을 먹고 산을 오르고 바다를 바라보며, 저는 제가 단단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전 인생을 오로지 홀로 살아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면 미쳐버릴 거예요

홀로되기를 두려워 하는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말이에요.

친구가 없으면 SNS로 카톡으로 떠들며 안절부절못하는 습관에서 벗어나

온전히 내가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내 인생의 마지막 내일로, 이렇게 완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