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은밀한 생, 파스칼 키냐르

koala초코 2014. 12. 16. 08:50

57쪽, 이따금 한 동작 속에, 우리의 취향 속에, 우리 목소리의 음향 속에 깊이 박힌 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의 무의식적인 여러 종류의 잔해들이 남아 있다. 그것들은 바닷물이 빠질 때 썰물이 바다로 끌어갈 수 없었던 녹색 게의 작인 발들이나 조가비들의 파편이다.

 

80쪽, 우리는 묵상에 잠기지 못하고, 서로의 품안으로 달려들게 만드는 사랑 속으로-말없는, 마법에 걸린, 향내 나는, 가식 없는, 아연하게 만드는, 우리의 포옹들이 반쯤 열어놓은, 직접적인 의사 소통 속으로-잠겨들어가지 못하고, 너무나도 많은 말을 했을 뿐이다. 흐트러진 침대 위에서 벗은 몸으로 웅크린 채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어둠 속에서, 겨울이 끝나갈 무렵 난로의 붉은빛에 잠겨, 우리 자신에 관한 끝없는 말들이 우리를 고독으로 밀어넣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의 자아에 값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관심, 진정한 비참함, 가련한 몸짓이었다.

 성실하려고 애쓴 무수한 말들이 도리어 우리를 허위로 변질시켰다.

 

94쪽, 그런데 사랑이란 정확히 이런 것이다: 은밀한 생, 분리된 성스러운 삶,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 그것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인 이유는, 그러한 삶이 가족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빛보다 먼저, 언어보다 먼저, 삶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어둠 속, 목소리도 없는, 출생조차도 알지 못하는, 태생의 삶.

 

110쪽, 두 장면.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두 장면이 있는데, 최초의 장면과 최후의 장면이다.

그것은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두 장면이다. (현존하는, 다시 말해서 생존하는 각 개인에게는 재현될 수 없는 두 장면이다.)

현존하는 자의 시선에 언제나 결여된 장면은 최초의 장면(우리들 육체의 수태, 수태를 일으킨 욕망의 조건들, 선정된 자세, 어머니의 몸 위에서 성교중인 남자의 신원 등등)이다.

살아 있는 자가 결코 보지 못할 장면은 죽음과 대면하는 최후의 장면(태아가 경험했던 심장의 박동이 멈추는 상황들,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가 울부짖는 동안, 울음 소리를 언어로 끌어들이면서, 신생아를 엄습했던 폐의 리듬이 질식되는 상황들)이다.

라틴어로 말하자면, 이런 이미지들은 끔찍스러운 것들이다.

그리스어 단어들을 사용하여 번역하자면, 이 장면들은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으로서의 장면들은 꿈이라는 비의도적인 광경에 자주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빈번이 의도적인 환상에도 등장한다. 과거에 대한 기억,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그것들의 유도적 결여 속에서 섞인다.

우리들의 낯설음의 양극단인 이 두 장면과 접촉하는 것은, 눈꺼풀을 닿지 않고 점액질로 끈적끈적한 안구의 노출 부분을 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짢으며 내밀한 일이다.

 

217쪽, 문이 열리고 있다는 기이한 느낌, 갑자기 문지방을 넘어선 느낌, 내 삶의 입구가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키는 느낌, 언어의 획득과 관련된 더 거칠고, 더 날것이고, 더 명철하고, 더 깊고, 더 생생한 경험의 느낌을 나는 자주 맛보았다. 삶이 아닌 것, 어리석음과 슬픔, 암울한 혼란, 이런 것들의 한 시대가 마치 허물처럼 떨어지는 느낌이다. 페이지들은 갑작스럽게 열린 창의 문짝들이다. 칩거 후에 동굴에서 나올 때의 느낌, 혹은 불확실한 시기의 언저리, 대여섯 살의 유년기로 잠수했다가 나올 때의 느낌,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변한다. 삶 전체가 갑자기 어조가 달라지면서 변모한다. 반향의 효과가 두개골 속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 자리잡는다. 의식 자체는, 의식이 전제되는 자율성 안에서 아무리 타산적이고 의심스럽다 할지라도, 의식하고 있다는 인상 혹은 분할한다는, 반향한다는 인상은 강렬한 쾌감이다. 그것은 제2의 태어남의 느낌, 부활의 느낌이다. 입문자의 느낌이다. 동화의 주인공의 기쁨이다.

 

250쪽, 매혹에 관해서, 귀는 음악을 가지고 있다. 눈은 회화를 가진다. 죽음은 과거를 가진다. 사랑은 타인의 벌거벗은 육체를 가진다. 문학은 침묵으로 환원된 개인의 언어를 가진다.

 

311쪽, 키르케가 말한다 : 자신의 나체를 맡기는 것(배설 구멍을 드러내기, 생식 구멍을 드러내기, 성기와 생식 기관들을 드러내기), 밤중에 잠든 육체를 고백하는 것, 자신의 이름을 실토하고 비밀을 말하는 것, 이런 것들이 사랑의 네 가지 표지이다.

 

363쪽, 자신의 근원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인간은 울부짖는 여자에게서 울부짖으며 나온다. 우리는 울부짖으며 천국을 떠난다. 우리는 울부짖으며 성적 쾌락을 맛본다. 우리는 쾌락을 느끼면서 세상을 떠난다. 참된 것은 떠난다. 순수한 떠남은 쾌락이다.

 

378쪽, 인간은 두 세계, 즉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와 죽은 자들의 세계를 가진 동물 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