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위하여

koala초코 2015. 1. 2. 13:14

[한밤의 아이들] 살만 루슈디, 1981, 문학동네(2013)


나는 봄베이 시에서 태어났는데....옛날옛날 한 옛날이었다. 아니, 안 되겠다, 연월일을 생략할 수는 없다. 나는 1947년 8월 15일 나를리카르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시간은? 시간도 중요하다. 그래, 좋다. 밤이었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실은 밤 12시 정각이었다. 내가 나오는 순간, 마치 경의를 표하듯이 시곗바늘들이 하나로 포개졌다. 아, 더 자세히, 더 자세히:나는 인도가 독립하는 바로 그 순간 이 세상으로 굴러 나왔다. (...중략...) 왜냐하면 덤덤하게 나를 맞이했던 그 시계들의 어떤 신비로운 횡포 때문에 나는 불가사의하게 역사에 손목이 묶여버렸고 나의 운명은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이어져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도입부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끔 생각한다. 역사적인 사건에 휘말린 혹은 주체적으로 뛰어든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뉴스를 보면서 자주 느낀다. 이 일들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나이고 역사는 역사인데, 역사 그 자체에 뛰어들려면 우리의 주인공 살림 시나이처럼 한 나라가 독립하는 바로 그 순간 태어나는 마법이라도 있어야지 않나, 자정에 태어난 천 명하고도 한 명의 '한밤의 아이들'처럼.


소설은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수다쟁이 화자 살림의 어법이 거침없고, 역사와 한 몸이 되어버린 운명이 거침없고, 현실에 스며든 마법의 장면들이 거침없다. 외할아버지 아담 아지즈의 거대한 코에서 루비가 흐르고 콧노래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허밍버드의 낙관주의 구멍 뚫린 침대보가 집안에 뿌리내린 조각나는 저주 혹은 유산 '물론 현실이 비유적 내용을 내포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현실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천 명하고도 한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일찍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천 개하고도 한 가의 가능성이 나타났다가 천 개하고도 한 개의 막다른 길로 끝나버렸다.'(1권 426쪽) 마귀와 싸우는 아버지와 빨래통의 유령과 대화하는 어머니 사랑을 불신하는 노래하는 놋쇠 잔나비 불안의 카레 분노의 도시락을 만들어 복수하는 이모 균열의 병에 걸려 사라진 할아버지와 모든 것을 흡수해 한없이 거대해지는 할머니 이 모든 살림 시나이의 가족을 '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발했다는 인도-파키스탄 전쟁 인도의 역사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살림 바꿔치기당한 아이는 빨래통에서 인도의 모든 이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가 마력의 원천인 오이 같은 코가 비염 수술로 정리되면서 초능력 대신 감정까지 맡을 수 있는 예민한 후각을 가졌다가 기억을 잃고 전쟁에 휘말렸다가 모든 것이 투명해지는 밀림에 갇혔다가 한밤의 아이들과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재회했다가 한밤의 아이들을 말살하기 위해 미망인 인디아 간디가 비밀리에 추진했(다고 주장하는) 프로젝트는 실제 인도 역사에 기록된 강제 단종정책과 포개지고 자정에 태어나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살림은, 살림과 바꿔치기당한 또 다른 아이 시바와 함께, 인도 그 자체의 운명을 온 몸으로 겪고, 아이를 바꿔치기했고 또 아이를 너무나 사랑했던 보모 메리의 피클공장에서 자신의 역사를, 역사에 손목이 묶여버린 운명을 기록하며 가족력인 '균열의 병'이 가져올 죽음을 대비한다.


이것은 하나의 망상일까? 과대망상증의 한 환자가 피클 공장에서 시간으로 피클을 만들겠다니 역사가 손목에 묶여버렸다니 물고기를 네 배로 불리고 돌멩이를 황금으로 바꿀 수 있는 한밤의 아이들이니 온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병이니 모든 것을 허무맹랑한 미친 사람의 독백으로 구겨 버려도 되는 걸까. 소설이니까 대충 넘어가자고 해도 될까. 그런데 왜 우리는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까. 왜 역사와 내가 한 몸으로 단단히 묶인 느낌을 받는 걸까. 미지의 영역인 인도 근대사를 더듬더듬 짚어가며 허겁지겁 살림의 목소리를 따라가면서 사납게 쏟아지는 이야기의 향연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걸까. 난 소설 하나를 읽었을 뿐인데 내 머리 위로 어디론가 길게 이어진 끈을 발견하게 되는 걸까.


과부 합숙소에서의 가혹한 경험으로 나는 '도피는 불가능하다'는 확실한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종이를 앞에 두고 앵글포이즈 램프의 불빛 아래 앉은 지금의 나는 그 시절과 달리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더는 바라지 않는다. 나는 누구-무엇인가? 내 대답은 : 나는 나보다 앞서 일어났던 모든 일, 내가 겪고 보고 실천한 모든 일, 그리고 내가 당한 모든 일의 총합이다. 나는 이-세상에-존재함으로써 나에게 영향을 주거나 나의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이고 사건이다. 나는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일어난 모든 일이며 내가 죽은 뒤에도 나 때문에 일어날 모든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특별히 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모든 '나'가-즉 지금은-6억-명도-넘는-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모두-그렇게 다수를 포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되풀이한다 : 나를 이해하려면 세계를 통째로 삼켜야 한다. -2권 302~303쪽


뉴스를 본다. 새해 첫날 제2롯데 균열 뉴스와 땅콩회항 뉴스 담배가격 인상 연말 시상식 이야기가 잡다하게 흘러나온다. 끔찍한 2014년 나는 세계가 나를 짓밟고 있다고 이미 느끼고 있었다. 역사는 나를 그냥저냥 존재만 하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거대한 몸체에 연결된 선을 흔들고 잡아당기고 밀치며 나를 자극하고 응답을 요구한다. 새해를 맞아 올해엔 나도 좀 역사와 밀당할 수 있기를, 조금 더 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를, 먼지 하나큼만이라도 바꿀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살림 시나이, 나도 알고보면 너에게 지지 않을 정도의 수다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