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이제야 읽은 한국 판타지 소설의 정수

koala초코 2011. 3. 27. 14:11
스물 다섯이나 되어서야 푹 빠진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 ♥

5권

242쪽, "사랑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다레니안은 느닷없는 질문에 의아해한다.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재촉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본다. 다레니안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른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다.
"사랑을 하고 있어요."
이번엔 핸드레이크가 당황한다. 그는 물끄러미 자신의 손바닥에 올라타 있는 요정의 여왕을 내려다본다.
"날 사랑합니까."
다레니안은 고개를 끄덕인다. 핸드레이크는 눈을 들어 다레니안을 외면한다. 그는 밤하늘을 바라본다. 어느 새 먹구름이 걷혔는지, 밤하늘엔 루미너스의 빛이 반짝인다. 핸드레이크는 달을 보며 말한다.
"그렇다면 내 모든 것을 사랑하십시오."
"예?"
"우리는 인간입니다. 당신 같은 페어리나 조화의 엘프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독단의 드워프도 아닙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무슨 뜻이죠?"
"우리는 하나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주군의 신하 핸드레이크, 루트에리노의 친구 핸드레이크, 바이서스 군의 참모장 핸드레이크, 클래스 9의 마법의 마스터 핸드레이크, 드래곤 로드의 철천치 원수인 핸드레이크, 그리고,,,,,,,"
핸드레이크의 입이 잠시 멈추었다가 말한다.
"고귀한 페어리퀸의 사랑을 받는 핸드레이크입니다."
다레니안은 붉어진 얼굴로 핸드레이크를 올려다본다. 하지만 무정한 핸드레이크의 얼굴은 아래를 향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달을 향해 말한다. 밤기운이 차갑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바로 나 핸드레이크입니다."
다레니안은 참지 못하고 말한다.
"무슨 말씀이죠?"
"인간은......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총애를 동시에 받습니다. 원래 불안하죠. 우리는 관계 속에 형성되는 존재입니다. 엘프나 페어리, 드워프들을 부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부러워한다 해서 우리가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
"페어리인 당신은 이해하기 어렵겠지요. 인간에게 있어 나는 하나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단수형이 아닙니다. 나라는 것은 원래 다면적이고 여럿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산다는 말이 원래 통하지 않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왜죠? 왜 안된다는 거죠? 굴뚝새에서부터 크라켄까지, 페어리에서부터 악마까지 모두 자신을 위해 살아요. 그런데 왜 인간은 그럴 수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인간이죠"
다레니안은 얼빠진 얼굴로 핸드레이크를 올려다 본다. 핸드레이크는 침울하게 말한다.
"당신이 날 사랑하려 한다면, 대왕의 원대한 희망을 함께 수행하는 핸드레이크, 루트에리노의 인간적인 갈등에 같이 가슴 아파하는 핸드레이크, 바이서스 군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핸드레이크, 사항 최초로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려 애쓰는 핸드레이크, 드래곤 로드를 죽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불사하는 핸드레이크, 이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레니안은 격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당신은 내 눈앞의 핸, 그것일 뿐이잖아요> 핸을 사랑하려고 수많은 핸을 찾아낼 필요는 없어요. 여기, 언덕 위에 앉아 있는 핸이잖아요! 나를 들고 있는 핸이잖아요. 드래곤 로드가 당신을 죽이려고 그 많은 핸을 일일이 하나씩 죽이지는 않잖아요! 드래곤 로드는 오로지 여기 있는 이 핸만을 죽이면 그만이잖아요! 마찬가지예요. 나도 그 많은 핸을 사랑할 수는 없어요. 여기 있는 이 핸만 사랑해요."
핸드레이크는 드디어 얼굴을 내려 다레니안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나 또한 당신을......."

6권

73쪽,  "안 될 거라고 생각해? 왕족의 피는 무슨 맛이지?"
길시언은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프림 블레이드를 맹렬하게 거머쥐었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그러나 시오네는 덤벼드는 대신 손을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냐. 길시언 왕자. 당신은 어차피 죽을테니까. 죽을 자에게 협박을 하지는 않아. 난 그런 취향은 없어.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은 당신 혈관에 흐르는 피가 다른 사람의 피와 다르다고 생각해?"
"...다르다."
"왕족의 피?"
시오네는 사납게 물어왔지만 길시언은 침착한 얼굴이었다.
"길시언 바이서스의 피."
"길시언 바이서스의 피라... 그래?"
"나의 의지를 위해 맥박치고, 나의 꿈을 위해 흐르는 나의 피다. 그것은 다른 누구의 피와도 다른, 오로지 나만의 피다."
"그런가? 그렇다면 당신의 피는 지금 당신을 구원하지 못해. 그 피 때문에 당신은 여기서 죽으려들고 있는걸."
길시언은 밤의 골목길 그 침침한 어둠 속에서 희게 웃었다.
"죽음도 내 삶의 한 부분이다. 떼어놓을 필요 없어. 다른 사람의 생명으로 자신의 죽음에서 도망치는 당신 같은 뱀파이어는 알지 못하겠지만."
시오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 그럼 그 피를 흘리며 죽어봐. 길시언 왕자. 그 왕족의 피를! 그리고 휴리첼의 피가 새로운 왕적의 피로 맥박치게 되겠지"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의 공식 명칭에는 항상 붙는 이름이 있다. 간첩이니까 그 정도는 알겠지?"
시오네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서? 당신 폐태자는 왕족의 위치를 버리고 백성에게 내려온 자라는 건가?"
"천만에. 난 백성에게 내려간 적은 없다."
"뭐라고?"
"난 무엇에게 다가가기 위해 무엇을 버린 적은 없다. 내가 버린 것은 내가 아닌 것. 그리고 난 버림으로써 나만을 남겨둘 수 있었다. 길시언. 모험가 길시언."
길시언의 목소리가 우울해졌다. 그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시간의 무게가 느껴진다. 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먼지 날리는 길을 걷고 걸어 이 곳에 선 폐태자. 그는 우리들 앞에 서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지. 처음 본 여자가 날 죽이려 드는군. 나에게서 모험가 길시언이 아니라 내가 버린 태자 길시언 바이서스의 피를 받아내려고 하는군."
시오네는 입술 끝을 올렸다.
"너희 나라의 핸드레이크가 페어리퀸 다레니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간은, 그렇군."
그러나 길시언은 갑자기 프림 블레이드를 앞으로 뻗어 시오네를 겨냥했다. 시오네는 마치 그 검끝이 자신의 가슴에 닿은 것인양 흠칫하며 물러났다.
"그러나 폐태자 길시언 바이서스도 나 모험가 길시언이 지키겠다. 그리고, 내 동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도 모험가 길시언으로서 지키겠다. 어둠의 레이디여... 그대 앞에 선 자가 무엇으로 보이는가? 만용을 부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가? 그렇다면 내가 어떤 자인지..."
길시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가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놓듯이 격렬하게 외쳤다.
"확인하라!"
짜릿한 감각이 전신을 파고 든다. 돈다. 뭐지? 입에서 어떤 말이 돈다. 들었던 말인데.
길시언은 나의 왕이었다.

139쪽, "내 고향은 사막이지. 이런 광경은 내겐 현실 이상이야."
"행복한가요?"
"지금은."
"지금 외엔 생각지 않고?"
"생각은 부질없어."
쏴아아아
"전향해서, 새롭게 살 거야."
"그럴 건가요."
"네 말이 도움이 되었다.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만들어는 가야지."
"만들어간다구요?"
"인생을"
쏴아아아.....
"어젯밤 모닥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불티가 하나의 생애라면, 불티는 우리들이 까무라칠 정도로 느리고 답답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할 거라고. 그런데 빗방울은 어떨까요."
"바다는 어떨까."
"예?"
"신은 어떨까."
"할말 없군요."
"할말이 없으면 안 되지. 인간이니까. 무슨 말이든 해야지. 어떻게든 살아야지."

7권

295쪽, "드래곤 로드는 태양이지."
우리는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칼의 말은 조용히 이어졌다.
"그는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고, 그리고 그의 빛은 무서울 정도로 세계를 비추지. 그는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권능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는 바라볼 수 없는 존재이며, 그 빛을 강요하는 존재야. 그는 자신의 빛 때문에 오히려 다른 어둠을 바라보지 못하지. 그는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말했다.
"루트에리노 대왕은?"
칼은 여전히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달이지."
"달이오?"
"우리가 어둠을 걸어갈 때 달은 우리를 비추지. 그의 빛은 똑바로 바라볼 수도 있고, 바라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지. 그는 만물을 다스릴 정도로 위대하진 않을지 몰라도,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조력이 되고 희망이 되는 존재였지."
"....우리는요?"
네리아의 약간 가냘픈 목소리였다. 칼은 빙그레 웃었다.
"우리 말이오?"
"예, 우리, 뭐, 예, 우리요."
"우리는 별이오."
"별?"
"무수히 많고 그래서 어쩌면 보잘것없어 보일 수도 있지. 바라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서로를 잊을 수도 있소. 영원의 숲에서처럼 우리들은 서로를, 자신을 돌보지 않는 한 언제라도 그 빛을 잊어버리고 존재를 상실할 수도 있는 별들이지."
숲은 거대한 암흑으로 변했고 그 위의 밤하늘은 온통 빛무리들 뿐이었다. 칼의 말은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줄 아오. 밤하늘은 어둡고, 주위는 차가운 암흑뿐이지만, 별은 바라보는 자에겐 반드시 빛을 주지요.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 존재하는 별빛 같은 존재들이지. 하지만 우리의 빛은 약하지 않소. 서로를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빛을 뿜어내지."
"나 같은 싸구려 도둑도요?"
네리아의 목소리는 슬프지 않았다. 그리고 칼의 대답도 평온했다.
"이제는 아시겠지? 네리아 양. 당신들 주위에 우리가 있고, 우리는 당신을 바라본다오. 그리고 당신은 우리들에게 당신의 빛을 뿜어내고 있소. 우리는 서로에게 잊혀질 수 없는 존재들이오. 최소한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이상은."
어둠 속에서 네리아의 눈이 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나는 혹시 반짝인 것은 그녀의 눈물이 아닐까 따위의 생각은 관두기로 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바라보자, 별들은 나에게 빛을 주었다.

9권

108쪽, "저, 후치야. 그게 무슨 말이니?
"응?"
"바보도, 범부도, 또 현자도 모두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고?"
"하하하...."
갑자기 아그쉬의 그 멍청한 인용이 생각나서 난 웃어버렸다. 그러자 레니는 눈살을 찌푸렸고 난 즉각 사과했다.
"다른 이야기가 생각나서 웃었어. 그 이야기는........말 그대로지."
"말 그대로라구?"
"그래"
"뭐가 그래?"
"그냥 그래."
레니는 눈썹을 곤두세우더니 말했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난 학교 같은 것 다닐 여유가 안 되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나도 학교는 구경도 못해 보고 자라난 사람이야. 그냥 생각해 봐, 레니. 이건 별것 없는 말장난이야."
레니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난 말장난은 같이 웃을 수 있을 때만 좋아해."
"하하, 그러니? 음, 앞을 보면서도 뒤에 따라오지도 않는 추적자를, 혹은 자신의 과거, 어제의 실수 따위를 생각하면서 진구렁에 발을 빠뜨리는 사람이 있다면 넌 그 사람을 뭐라고 부를 거지?"
"바보......지?"
"그래. 바보는 마치 곰곰히 생각하기만 하면 지나간 실수가 바로잡아진 것처럼 믿지. 과거는 절대로 바뀔 수 없는 것, 완전히 고정된 것인데 말이야."
"그럼 범부는?"
"범부도 어떤 의미에선 바보와 마찬가지야.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나간 실수를 생각해서 앞으로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범부, 보통 사람일 뿐이지. 하지만 범부라고 해봐야 결국은 그 사람도 과거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야. 바보든 범부든 과거라는 시간의 산물이지. 바보는 그것에 매달리고, 보통 사람들은 그것에서 배운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의 저 감춰진 시선을 느끼는 것은 퍽 유쾌한 일인걸? 두 사람은 모두 안 듣는 척하면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능숙한 거짓말쟁이나 사기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 자신의 행동을 잘 감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키키키키. 레니는 한참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그 풀려버린 표정 그대로 말했다.
"그럼......현자는?"
"현자는 과거의 시간과 상관없는 존재가 현자야. 그는 현명하므로 과거를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미래를 깨달을 수 있지. 사실 이런 사람은 드물지. 핸드레이크나 그렇게 불릴 수 있을까? 어쨌든 그런 사람들은 역사책을 읽지 않아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 왜냐하면.........그들은 사물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생각하니까. 여기서는 사실 '앞'이라는 말과 '뒤'라는 말이 다른 의미로 쓰이는 거야. 음, 그러니까 레니, 넌 지금 나의 앞을 보고 있지?"
"그렇지."
"그렇지만 만일 네가 내 앞 모습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것을 생각해서 볼 수 있다면 넌 현자인 셈이지."
"아........, 그래?"
"그래."

10권

66쪽, "모든 종족의........부조리라."
하슬러는 우울한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혼자말을 하듯이 말했다.
"과연.........그렇소. 엘프는 선량하고 강하고 지혜롭지만 자신의 조화 때문에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존재.......드워프는 인내심 강하고 끈질기고 단호하지만 자신의 외곬수 때문에 세상에 격리될 수밖에 없는, 산속이나 지하에서만 자신들끼리 살아가는 존재...."
엑셀핸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대신 파이프를 꺼내어 담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칼은 여전히 누구에게도 시선을 보내지 않은 채 자신에게 말하듯 말했다.
"그리고.......우리는.........강력한 번식력을 가지고 얼핏 보면 무모할 정도의 상상력을 갖추었지만, 그 번식력과 그 상상력 때문에 모든 것을 우리 자신으로 만들어버리는 존재. 숲을 걸어 오솔길을 만들고, 하늘을 바라보아 별자리를 만들고, 땅을 굽어 봄에 울타리가 생기게 하고, 바다를 헤치면 항로가 생기게 만드는, 독존적인 존재."

159쪽, "헨드레이크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한 적이 있습니까?"
"뭐?"
"헨드레이크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한 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간곡하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혹은 당신에게 무엇이 되라고 요구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이 변화될 것을 요구한 적이 있습니까?"
다레니안은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번도 없었겠지요. 우리들이 보통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파괴입니다. 상대에 대한 적극적 파괴 행위지요. 그 점에선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우린 불길일지도 몰라요."
"파괴라구?"
"그래요. 상대를 원래의 모습으로 있게 두지를 못하지요. 어떻게든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하려 애씁니다. 상대가 스스로의 즐거움, 스스로의 기쁨을 누리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음으로써 즐겁고, 나와 함께함으로써 기쁘기를 바랍니다. 상대가 알고 있는 그만의 즐거움을 이해해 주지 못하고. 이 점에선 사랑과 증오는 거의 같아요. 어쨌든,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니까요."
"난, 난 네 말을......"
제레인트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이 뭔지 아십니까?"
"뭐?"
제레인트는 엄숙하게 말했다.
"짝사랑이지요."
윽,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제레인트는 여전히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뭔지 아십니까?"
"난, 난..."
"상사병이올시다."
도저히 못 참겠다. 난 맹렬하게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돌렸다. 내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찔끔거리는 동안에도 제레인트는 계속 웃지도 않은 채 말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짝사랑과 상사병은 상대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슬프고 아프지요. 참 글러먹은 문제입니다. 짝사랑을 하면 그냥 그 사랑을 소중히 여기면 될 문제인데 말입니다. 상대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꼭 그것 때문에 슬퍼하고 아파해야 된단 말입니다. 상대로 날 봐주었으면, 날 생각해 주었으면, 날 사랑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고,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고장이 나버리지요. 고약하다면 고약한 것이고, 동정하려고 들면 정말 동정받을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도, 도대체 무슨 말을......"
제레인트는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조금 꺾더니 다레니안을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당신도 그 점에선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뭐라구?"
"사랑은 어쩌면 모든 종족에게 있어서 마찬가지의 불길일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은 그가 변화하기를 바랐을 겁니다. 맞습니까?"
"변화........?"
"만물을 사랑하는 핸드레이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사는 핸드레이크가 되기를 바랐을 겁니다. 당신은 세계를 사랑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겁니다. 사실 누가 그런 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당신은 제멋대로 그가 변화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그의 모습으로 있게 허락하지 않고, 그를 파괴해서 재조립하려고 했을 겁니다. 맞습니까?"
다레니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창백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마주볼 뿐이었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은 그의 모습에 맞추어 당신의 사랑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맞추어 그를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적어도, 내가 들은 바로는 그렇습니다."
다레니안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럼, 그럼 네가 말하고 싶은, 진정한, 진정한 사랑은 뭐지?"
"상대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

12권

"내 역할은 여기서 끝났어요. 첫눈을 그 만가로 삼아 떠나간 내 마법의 가을처럼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