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두근두근 내 인생 다시읽기

koala초코 2011. 6. 19. 14:36
p11 이제 나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말은 거의 다 안다. 중요한 건 그 말이 몸피를 줄여가며 만든 바깥의 넓이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바람이라 칭할 때, 네 개의 방위가 아닌 천 개의 풍향을 상상하는 것. 배신이라 말할 때, 지는 해를 따라 길어지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쫓아가보는 것. 당신이라 부를 때, 눈 덮인 크레바스처럼 깊이를 은닉한 평편함을 헤아리는 것. 그러나 그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일 것이다. 바람은 자꾸 불고, 태어난 이래 나는 한번도 젊은 적이 없었으니까. 말들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까.

p51 평소 혼자 있는 시간에는 주로 책을 읽어왔다. 처음엔 학교 진도를 따라가려고 펼친 거였는데, 나중에는 심심해서 절로 찾게 되었다. 책은 내게 밤새도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이자, 세상의 지식과 정보를 알려주는 선생님, 그리고 비밀과 고민을 함께 나누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아파 자주 나가 놀 수 없었던 나는 세계의 온갖 저자들과 함께 스포츠를 즐겼다. 나는 플로베르가 공격수로 나서고 호메로스가 미드필드를, 셰익스피어가 골대를 맡은 가상의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다. 나는 플라톤이 포수로 아리스토텔레서가 투수로 나선 스타디움에서 야구를 했다. 경기장의 풍경은 대략 이랬다. 플라톤이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면 질겅질겅 껌을 씹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고개를 끄덕인 뒤 한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그러면 곧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변화구가 고대로부터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나는 내 키보다 큰 방망이를 멍청하게 휘두르며 헛스윙을 했다. 물론 철학서는 꽤 어렵고 지금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데가 수두룩하지만, 나는 그걸 우아하고 긴 한 편의 시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당장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언젠가 내게 제 발로 걸어와 '나야.....'하고 웃으며 인사를 건넬 터였다. 마치 인생의 중요한 교훈들이 대부분 그런 식으로, 나중에야 도착하듯 말이다. 시인들과의 테니스, 극작가들과의 바둑, 과학자들과의 배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달리기를 하지 않고도 심장을 빨리 뛰게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p79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나는 그 찰나의 햇살이 내게서 급히 떠나가지 않도록 다급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그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누구도 본인의 어린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니까. 특히 서너살 이전의 경험은 온전히 복원될 수 없는 거니까, 자식을 통해 그걸 보는 거다. 그 시간을 다시 겪는 거다. 아, 내가 젖을 물었구나, 아, 나는 이맘때 목을 가눴구나, 아, 내가 저런 눈으로 엄마를 봤구나, 하고. 자기가 보지 못한 자기를 다시 보는 것. 부모가 됨으로써 한번 더 자식이 되는 것.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그러면 세살 무렵부터 늙기 시작한 아기를 가진 우리 부모님은 나를 통해 무엇을 보았을까.....곧이어 나는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하느님은 왜 나를 만드셨을까?'
 불행히 그 해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p96 나는 내가 몸이 있단 사실을 깨닫는 데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혓바늘이 돋은 순간만큼 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때도 없는 것처럼, 각 기관들을 아주 세부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의식하며 살아야 했다. 남들이 뼈를 뼈라 부를 때, 나는 그걸 그냥 뼈라 부를 수 없었다. 남들이 폐를 폐라 말할 때, 나는 그걸 단순히 폐라 여길 수 없었다. 의대생들이 밤을 새우며 달달 외는 수백개의 이름처럼, 내가 가진 단어에는 그것이 몸에 붙기까지 견뎌온 시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내개 피부가 있다는 걸, 심장과 간, 근육이 있다는 걸 매번 상기해야 하는 건 고단한 일이었다. 육체와 정신이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 해도, 가끔은 반드시 떨어져 있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연인들처럼, 혹은 사이좋은 부부들이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건강에 무지한 건강, 청춘에 무지한 청춘이 부러웠다.

p182 여러 글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해라는 말, 예전에는 나도 참 싫었는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먼 곳에서 건네주는 따뜻한 악수가 먹먹했다. 터무니없단 걸 알면서도 또 번번히 저항하면서도, 우리는 이해라는 단어의 모서리에 가까스로 매달려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인간은 이렇게 이해를 바라는 존재로 태어나버리게 된 걸까? 그리고 왜 그토록 자기가 느낀 무언가를 전하려 애쓰는 걸까? 공짜가 없는 이 세상에, 가끔은 교환이 아니라 손해를 바라고, 그러면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또 왜 존재하는 걸까? 나는 몇개의 글을 더 훑어봤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내가 조금은 덜 외로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참 뒤, 나는 마지막으로 '대단하다'는 제목의 게시물을 클릭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단하다. 나라면 자살했을 텐데...ㅋㅋㅋ'

p260 어른이 되는 시간이란 게
       결국 실망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글이란 게 그걸 꼭 안아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보다 '잘' 실망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무엇인지도 모르겠어.

p271 음,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해볼게.
       우리집엔 황토쌀독이 하나 있어.
       이른 아침, 어머니는 밥을 하려고 거기서 쌀을 푸곤 했는데,
       그때 나는 어렴풋이 부엌에서 새어나오는 독 뚜껑 닫히는 소리가 좋았어.
       그 소리를 들으면 살고 싶어졌지.
       상투적은 멜로영화 예고편, 그런 것을 봐도 살고 싶어지고.
       아! 재미있는 오락 프로그램에서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재치있는 애드리브를 던질 때, 그때 나는 살고 싶어져.
       동네 구멍가게의 무뚝뚝한 주인아저씨,
       그 아저씨가 드라마를 보다 우는 것을 보고 살고 싶다 생각한 적도 있어.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여러가지 색깔이 뒤섞인 저녁 구름, 그걸 보면 살고 싶어져.
       처음 보는 예쁜 단어, 그걸 봐도 나는 살고 싶어지지.
       다음은 막 떠오르는 대로 나열해볼게.
       학교 운동장에 남은 축구화 자국, 밑줄이 많이 그어진 더러운 교과서, 경기에서 진 뒤 우는 축구선수들, 버스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여자애들, 어머니의 빗에 낀 머리카락, 내 머리맡에서 아버지가 발톱 깎는 소리, 한밤중 윗집 사람이 물 내리는 소리, 매년 반복되는 특징 없는 새해 덕담, 오후 두시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화를 걸어 말도 안되는 성대모사를 하는 중년남자, 내 상상의 속도를 넘어서며 새롭게 쏟아져나오는 전자기기들, 한낮의 물리치료실에서 라디오를 통해 나른하게 들려오는 복음성가, 집에 쌓인 영수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