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당신들의 천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koala초코 2011. 6. 25. 14:40
p64 하기야 사람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난 자 어느 부처님이라고 자신의 동상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인가. 누구에게나 가슴속 깊은 곳에는 그런 동상이 하나씩 숨겨지고 있게 마련인지 모른다. 차이가 있다면, 사람에 따라 그것을 어떻게 숨기고 지내느냐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참으면서 그 동상의 환상에서 끝끝내 눈을 감고 견딜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더욱 무리한 주문을 말한다면, 어떻게 그 단단하게 굳어진 동상의 벽을 아픔을 무릅쓰고 스스로 헐어나갈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부임 연설 따윌 참지 못한다고 원장을 탓할 수는 없었다. 약속을 해도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 약속이 원장의 가슴 속에 은밀히 숨어 있을 그의 동상과 얼마나 가깝게 상관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원장 자신이 그의 좁은 가슴 속을 튀어나와 만인 앞에 자랑스럽게 서고 싶은 그 은밀스런 동상의 충동을 어떻게 현명하게 견디어내느냐는 점이었다. 그의 약속이라는 것은 적어도 자신의 동상과 그 동상의 충동을 외면하고 난 다음의 것이어야 했다.


p157 명분은 믿을 것이 못 되었다. 섬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섬사람들은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상욱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명분이 아니라 그것을 갖게 되는 과정이었다. 명분이 과정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명분이 제물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천국이 무엇인가. 천국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마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스스로 구하고, 즐겁게 봉사하며, 그 천국을 위한 봉사를 후회하지 말아야 진짜 천국을 얻을 수 있었다.


p337 "그야 물론 사랑이어야겠지. 이제 이 섬은 자유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으니 다시 또 그런 자유로만 행해나갈 수는 없을 게야. 자유라는 건 싸워 빼앗는 길이 되어 이긴 자와 진 자가 생기게 마련이지만, 사랑은 빼앗음이 아니라 베푸는 길이라서 이긴 자와 진 자가 없이 모두 함께 이기는 길이거든. 하지만 이건 물론 자유로 행해나갈 것도 지레 단념을 한다는 소리는 아니야. 아까도 잠깐 말했지만 이제 이 섬에선 자유보다도 더 소중스런 사랑으로 행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소리일 뿐이지. 자유가 사랑으로 행해지고 사랑이 자유로 행해져서, 서로가 서로 속으로 깃들면서 행해질 수만 있다면야 사랑이고 자유고 굳이 나눠 따질 일이 없겠지만, 이 섬에서 일어난 일들로 해서는 자유라는 것 속에 사랑이 깃들기는 어려워도, 사랑으로 행하는 길에 자유가 함께 행해질 수도 있다는 조짐은 보였거든. 그리고 아마 이 섬이 다시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그 사랑 속에서 진실로 자유가 행해지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 가선 이 섬의 모습도 많이 사정이 달라질 게야.'


p385 언젠가도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누구나 오늘의 자기 현실을 최종적이고 불가변의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현실이 아무리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현실은 내일 다시 선택적으로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 위에 내일의 선택이 열려 있지 않는 한 그 현실은 누구에게도 천국일 수가 없습니다. 선택과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필생의 천국이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지옥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섬 위에 꾸미고 계신 원장님의 천국은 어떻습니까. 정직하게 말해 그것은 이 섬 원생들의 천국이기 전에 우선 원장님의 천국인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오직 원장님 한 분만의 천국일 수도 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이 섬 원생들이 목숨을 다할 때까지 편안히 지내다 갈 수 있는 그런 천국을 꾸미고 싶어하십니다. 원생들 역시 즐거이 그 천국을 받아들여야 하리라고 굳게 믿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일 다시 그 천국을 바꾸거나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믿고 계십니다. 원장님께서는 그처럼 누구도 그 원장님의 천국을 거역할 수 없는 필생의 천국을 만들고 싶어하십니다.
 하지만 진정한 천국이라면 전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먼저 선택이 행해져야 할 것이고, 적어도 어느 땐가는 보다 더 나은 자기 생의 실현을 위해 그 천국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천국이란 실상 그 설계나 내용이 얼마나 행복스러워 보이느냐보다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선택 여부와 내일의 변화에 대한 희망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느냐에 더욱 큰 뜻이 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식만 있었을 뿐 원생들의 진정한 선택이 있을 수 없었던 그 마지막 정착지로서의 천국-필생의 천국-그것은 원생들의 천국이 아니라, 다만 그렇게 믿어주기를 바라면서 거의 일방적으로 그것을 점지해주고 싶어하신 원장님이나 원장님과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섬 바깥에서 이 섬을 저들의 천국이라고 말하게 될 바로 그 사람들의 천국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은 그것을 이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완벽하게 만들어갈수록 그것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숨막히는 지옥이 되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나라에서 가장 핍박받아온 이들이 모인 섬 소록도를 배경으로 천국과 자유, 사랑에 대한 묵직한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이 소설은 한 마디로 '어렵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칫 추상적인 개념들이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풀려나간다. 그 이야기의 흐름에 나도 모르게 빠져 들어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개씩은 품고 있을 이상이나 욕망, 꿈 어떤 식으로 불리든지 품고 있을 '그것'을 '동상'으로 상징화하고, 인간이라면 언제나 하나씩 간직하고 있을 이상향을 '천국'이라 말하며 그 천국이 어떻게 지옥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훌륭하게 형상화한 것이 이 소설을 소설답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소설이 구체적인 현실성을 내뿜게 하는 이유로, 소록도라는 실제 배경과 소설 속 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조창원 원장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을 읽기 전에 소록도가 어떤 섬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주인공 조백헌 대령이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쓰여진 사실은 소설을 다 읽은 뒤 작가의 말에서 알게 되어 깜짝 놀랐다. 그 실제 모델이 작가가 소설 속에서 꿈꿨던 '자유와 사랑의 성자적 실천자'가 되었다는 후일담도...현실이 소설에 영향을 끼친다지만, 때론 이렇게 소설이 현실에 무시 못할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소설을 직접 읽기 전부터 제목만으로도 많은 생각을 던지게 하는 [당신들의 천국]. 도시의 거대 전광판에 녹색으로 피어오른 강의 모습을 보여주며 4대 강 사업 홍보에 열을 올리는 그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국민을 위해, 자연을 위해 그들은 이 일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던 천국이었다. 허황된 세계, 이 세계엔 너무나도 많은 '당신들만의 천국'에 이미 포화상태다.
 슬픈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