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윤고은의 1인용 식탁

koala초코 2011. 8. 21. 14:47
p25 어릴 때는 홀수가 싫었다. 무리를 굳이 둘씩 나누는 상황이 종종 일어났기 때문이다. 운동장에서, 수학여행 가는 버스에서, 놀이기구에서, 관계는 '둘'로 정의되었고, 전체가 홀수였다면 한명은 꼭 남았다. 3-2=1, 5-2-2=1, 7-2-2-2=1, 이런 계산법으로 인해 외톨이가 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정원이 48명인 반에서 나는 마음이 편안했고, 47명인 반에서 마음이 불안했다. 48명인 반에서 일어나는 전학이나 결석, 조퇴와 같은 일들도 역시 불안했다.
 어릴 때 운동장이나 교실 안에서 겪었던 홀로됨의 어색함은 결국 교문 안에서만 유효할 뿐, 그 당시에는 중요했던 그 문제가 사실 미니어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정말 비극이 시작된다. 교문 밖에서 울타리도 없이 벌어지는 홀로됨의 비극은 더 이상 누구의 이목도 끌지 못한다. 그냥 무관심 속에 도태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관심 속에서 오래 머물면 처음에 그 무관심의 주체가 타인이었는지 자기 자신이었는지도 혼란스러워진다. 그래서 점심 회식과 같은 일이 다가오면 오히려 그 상황이 어색해지기도 한다. 혼자 밥 먹기의 단계에 도전하고 있던 나로서는 더더욱.

<1인용 식탁>


p142 사람들은 시간이 없었고, 꿈을 사랑하긴 했지만, 꿈 없는 잠을 원했다. 그들은 꿈을 직접 꾸기보다는 간편하게 사기를 원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낮 동안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대견해서 밤에는 어떤 틈도 허용하지 않는 깊은 잠에 빠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일부러 그렇든 아니든 간에 사회는 사람들에게 숙면을 강요하고 있었다.

<박현몽 꿈 철학관>


p268 아이슬란드는 추상어였다. 사람마다 번역이 다르고, 정의되는 것도 다른,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단어. 그게 아이슬란드였다. 추상어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반대말을 설정하는 거라고, 그렇게 믿었던 나는 아이슬란드의 반대쪽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그것을 안다면 진짜 아이슬란드도 어느 지점쯤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가도 가도 반대쪽은 나오지 않았다.

<아이슬란드>





중학교 때, 반 년에서 일 년 가까이 가까운 친구가 없던 적이 있었다. 학교와 같이 오랜 시간을 함께 부대껴야 하는 특수한 공동체 생활에서 고독은 곧 지옥과 동의어가 된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쓸쓸함이라는 감정은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심장에 불을 질러, 그 불은 평생을 가도 꺼지지 않을 수도 있다. 

 수학여행이나 수련회를 갈 때 버스에 혼자 앉기는 그럭저럭 견딘다 해도, 조별활동을 해야 할때 끝내 마지막까지 혼자 남는 그 기분은 이 세계에서 버림받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내게 무엇보다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점심시간에 급식을 혼자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 모두들 내게 등을 돌리고 식사를 한다. 눈에 띄는 괴롭힘도 멸시도 없다. 그저 날 무리에 껴 주지 않을 뿐이다.  

 아직까지도 혼자 식당에서 식사를 못 한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비웃는 것만 같아서. 

 그런 나에게 <1인용 식탁>은, 아아, 문학의 윤리적 가치니 미학적 가치니 다 필요없다. 문학은 위로하기 위해 존재한다. 홀수의 고통, 고독의 지옥, 아직도 크기를 줄이지 못한 나의 고독의 그림자는 이제야 조금 짧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