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생의 한가운데

koala초코 2011. 9. 12. 14:51
p21 때때로 나는 아직도 인기척이 없고 모든 것이 회색인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깹니다. 그러면 나는 공포를, 목을 죄는 공포를 느낍니다. 그럴 때면 어떤 위대한 것에 대한 상념도, 신에 대한 생각까지도 나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 공포와 완전히 혼자인 것입니다. 공포와 가장 무서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해봅니다. 그러면 나는 여러 개의 대답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내가 이 생에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리라는, 아무것도 훌륭한 것을 이룰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내 생명을 그저 아무렇게나 흘려보내고 참으로 살지 않았으리라는 공포입니다. 또는 내가 어떤 과오를 범하고 그 과오가 나의 발전을 좁은 범위 내에서 움직이도록 판결지워 버리리라는 공포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는 참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내 속에서 무슨 훌륭한 게 나오겠어요! 이 무슨 교만일까요, 그런데도, 나는 이것을 당신한테는 말하겠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속에는 무엇인지 모르는 게 들어 있어서 나에게 말합니다. 너는 그것에 도달하리라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도달하지 못할까봐 두렵습니다.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까봐 두렵습니다. 영원히, 그건 끔찍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공포의 가장자리에 불과합니다. 포착할 수 없는 바깥의 가장자리에 불과합니다. 진짜는 포착할 수 없습니다.


p45 내가 죽어야 한다면 알고 싶습니다. 죽음은 중요한 일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단 한 번밖에 체험하지 못하는데 왜 의식 없이 받아들여야 해요? 마치 도살당하기 전에 머리를 얻어맞는 짐승과도 같이....나는 깨어 있고 싶어요. 나는 그것을 알고 싶어요. 죽음은 굉장한 것일 거에요. 멋질 거예요.


p68 웃지 말아, 라고 니나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누구든지 의욕하기를 그치면 늙기 시작하는 거야. 얼마 전까지도 나는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침마다 일어났어. 나는 마치 아침마다 문간에 서서 코를 바람 속에서 벌름거리면서 사냥에의 욕망으로 떠는 사냥개와도 같았어. 그런데 지금은 나는 이미 나 자신에게 있어서 조금도 의외의 무엇을 갖고 있지 않아. 그리고 인생은 끝없는 풀밭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네 개의 벽이 있는 공간이야.


p76 언니도 이런 경험이 있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전날과 아주 달라진 것을 발견하는 일이? 갑자기 걸음걸이도 달라지고 글쓰는 것도 말하는 것도 달라진 경험이 있어? 다른 사람은 보아도 모르지만 우리 자신은 잘 알고 있는 변화인 것이야. 우리는 이렇게도 될 수 있고 또 전연 자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돼. 우리는 변신할 수 있고 자기 자신과 유희할 수 있어. 책을 읽었을 때 우리는 책 속에 있는 이 사람 또는 저 사람과 같다는 것을 알게 돼. 그리고 다음 책을 읽었을 때는 또 다른 모습과 같은 걸 알게 돼. 이러게 끝없이 계속되곤 해. 사람은 몸을 굽히고 자기 자신 속을 들여다보면 수백개의 나를 볼 수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도 참 자기가 아니야. 아마 그 수백 개를 다 합치면 정말 자기일지도 모르지.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적어도 믿고 있어. 그렇지만 우리는 이 수많은 자기 중에서 다만 하나만, 미리 정해진 특정의 하나만을 택할 수 있을 뿐이야.


p127 언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운명이 없어,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야. 그들은 운명을 가지려고 하지 않아. 커다란 단 한 번의 충격을 피하고 그 대신 수백 개의 작은 충격을 받아들이고 있어. 그러나 커다란 충격만이 우리들 앞으로 날아가는 거야. 작은 충격은 우리를 점점 비참 속에 몰아넣고, 그러나 그건 아프지 않거든. 타락은 편한 일이니까. 내 생각으로는 그건 마치 파탄 직전에 있는 상인이 파산을 감추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고 일생 동안 이자를 갚아가는 공포에 싸인 소상인으로 그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나는 언제나 파산을 선언하고는 다시 처음부터 개시하는 편을 택하고 싶어.


p175 나에게는 행복이란 한순간 동안, 또는 한 시간, 또는 아주 길어서 하루 동안 나에게 나의 생이 완전히 무의미하지 않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뜻한다.


p207 니나는 나를 바라보았다. 생을 사랑한다구요? 라고 니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당신을 통해서 생을 사랑하는 거예요.
 맹목적인 고통과 정열에 찢겨 있던 나는 외쳤다. 그러나 나는 생을 너의 안에서 사랑한다. 다만 너의 안에서만, 너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생을 사랑한다. 그것이 우리들 사이의 차이야.


p330 그러면 나보고 사는 것을 그만두란 말이세요? 내가 여태까지 살아 보았던가요? 나는 살고 싶어요. 생의 전부를 사랑해요. 그렇지만 나의 이런 마음을 당신은 이해 못하실 거예요. 당신은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생을 피해 갔어요. 당신은 한 번도 위험을 무릅쓴 일이 없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잃기만 했어요.


 민음사판 [삶의 한가운데]는 내 고등학생 시절 내내 읽었는데도 다 읽었는지조차 기억도 남아있질 않다. 읽는 행위 자체가 고통이었다. 이번 전혜린 번역의 [생의 한가운데]는, 글쎄, 내가 나이를 먹어서인지, 번역이 매끄러워서인지, 번역자의 생이 떠올라서인지, 그때보다 삶과 사랑을 손톱때만큼이나 더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시험 두 달도 전에 고시원 방에서, 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