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희망 없이 인간은 고난을 이기지 못한다

koala초코 2011. 2. 5. 15:06

"어젯밤의 피난만들을 보니 지난번 내가 진남포에 갔을 때 만난 그쪽 마을 사람들 생각이 납디다. 그 무렵 난 목사로서의 나의 삶을 괴롭혀 온 그 유혹에 이제 굴복할 때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있었소. 내 절망은 너무도 큰 것이어서 감당하기 어려웠고 사람들을 사랑할 힘과 용기를 더는 끌어 모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 때에 내 옛 친구인 그 목사의 마을을 찾게 된 겁니다. 거기서 내 친구 목사를 만나고 그곳 교인들과 함께 며칠 지내는 동안 나는 절망이 어떻게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들을 삶의 어둔 감옥으로 던져 넣고 있는지를 보았소. 마을은 폭격과 포격을 당하고 석 달 사이에 두 번이나 털려 모두 알거지가 돼 있었소. 젊은 남자들은 전쟁에 나가 죽고 딸, 누이, 아내, 어미 할 것 없이 여자들은 죄 강간당하고 먹을 건 없고 병자가 생겨도 돌봐줄 길이 없었소. 지옥이 따로 없었다오. 나는 인간이 희망을 잃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는지,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거기서 보았소. 그렇소, 당신이 환상이라 부른 그 영원한 희망 말이오. 희망 없이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인간은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 희망과 약속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하긴 이게 사실이지만) 다른 데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난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던 겁니다."

"하지만 목사님, 당신의 희망과 당신의 약속은요?"

"나의 희망? 될수록 많은 이들이 절망의 노예가 되지 않고, 될수록 많은 이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서 이 세상의 고난을 이겨내고, 될수록 많은 이들이 평화와 믿음과 축복의 환상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 그게 내 희망이오."

 

 

김은국[순교자]

 

 

 김은국이라는 이름을 처음 소개해 준 책이 김병익의 [한국문단사] 였습니다. 타임지가 도스토예프스키, 카뮈의 전통을 잇는 문제작으로 높이 평가하고, 하인리히 뵐도 독일어판 서평에서 높게 평가한 [순교자]는 신을 잃은 시대에 있어서의 세계의 진상과 인간의 구원이란 거대한 보편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293p)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뮈의 뒤를 잇는 작품이라니! 이 때만 해도 한국어판 [순교자]는 구하기 어려운 책이었으나, 곧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어 새로이 출간되었습니다. [한국문단사]에서도 한국인이 노벨문학상을 타게 된다면 가장 가까운 후보자로서 김은국을 꼽고 있는데, 책 뒤에 실린 연표를 보니 실제로 1967년에 한국계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셨더군요. 한 번 읽어 보면 어떻게 후보까지 오르고 저런 찬사를 듣게 되었는지 절로 깨닫게 됩니다.

 간결한 문체에 실린 무거운 주제들이 압도하는 작품...이라고 지금의 저는 간결하게 평해 보려 합니다. 앞서 인용한 '나는 인간이 희망을 잃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는지,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거기서 보았소'라는 문장과, 소설의 화자인 이 대위가 신 목사에게 끊임없이 되묻는 질문 '목사님의 신-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라는 문장들에 대해 어떤 독후감이 필요한지, 저로서는 도저히 알 수조차 없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