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한 권의 책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koala초코 2012. 1. 15. 22:19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은 최성일의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메모해둔 책들 중 하나였다. 도서관에서 읽을 책을 고르다가 문득 내 독서법을 갱신해야할 필요성을 느껴 간택한 책이었다. 결과는, 새해맞이 독서로 부족함이 없는 더할나위없는 최상의 선택!
 언제부턴가 내게 독서는 질이 아닌 양적인 행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다음으로 읽어야 할 책 때문에 초조해하고,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데 읽은 책 권수를 채우기 위해 대충 넘어가고...한 권에 대한 독후감보다 여러 권을 나열한 독서 목록의 과시.....그 독서에 '나'는 없었다.
 헤세의 독서에 대한 충실한 조언들을 읽으며 올해의 독서 목표를 재정비했다. 많이 읽기보다 깊이 읽기, 이것저것 정신없이 읽기 말고 하나의 테마에 따라 끝까지 이어읽기. 독서는 삶을 위해 존재한다는 헤세의 충고를 되새기며 2012년을 시작한다.


p11 인생은 짧고, 저세상에 갔을 때 책을 몇 권이나 읽고 왔느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가치한 독서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미련하고 안타까운 일 아니겠는가?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책의 수준이 아니라 독서의 질이다. 삶의 한 걸음 한 호흡마다 그러하듯, 우리는 독서에서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더 풍성한 힘을 얻고자 온 힘을 기울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을 재발견하기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 몰두할 줄 알아야 한다.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나가면서 기쁨이나 위로 혹은 마음의 평안이나 힘을 얻지 못한다면, 문학사를 줄줄 꿰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아무 생각 없이 산만한 정신으로 책을 읽는 건 눈을 감은 채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p22 이 무한한 책의 세계는 모든 진정한 독자들에게 각각 다른 모습으로 보이며, 개개의 독자는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추구하며 경험한다. 어린이 동화와 인디언이야기 책에서부터 셰익스피어나 단테로 더듬어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이 총총한 하늘에 대한 작문숙제를 계기로 케플러나 아인슈타인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순진무구한 어린이 기도문에서 출발하여 성 도마나 성 보나벤투라의 신성하고 정결한 성전으로 혹은 탈무드 사상의 정교하고 숭고한 승화 혹은 우파니샤드의 봄날 같은 비유들이나 하시딤 사상의 감동적인 지혜 혹은 간결하면서도 친근하며 너무나 온화하고 유쾌한 고대 중국의 가르침으로 나아간다. 수천의 길이 울창한 숲을 가로질러 수천의 목적지로 우리를 인도하지만 그 어떤 목적지도 최종은 아니요, 그 너머마다 광활한 세계가 또 새롭게 펼쳐진다.


p37 그러나 나 자신도 글 쓰는 사람으로서 진즉 깨달은 게 있다. 소재를 '선택'하는 작가는 진정한 작가가 아니고 그런 책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사실, 문학작품의 소재 자체는 결코 가치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세계사의 가장 멋들어진 소재를 사용하고도 형편없는 문학이 나올 수도 있고, 잃어버린 바늘이나 눌어버린 수프처럼 정말 너무나 사소한 걸 다루고도 얼마든지 진정한 작품이 있을 수 있다.


p76 진정한 비평가를 식별하는 두 가지 중요한 표지가 있다.
 첫째, 진정한 비평가는 자기가 구사하는 언어와 허물없이 친숙하여 오용하는 법이 없으니 살아 있는 좋은 글을 쓴다. 둘째, 자신의 주관성과 개인적인 기질을 절대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와 노력이 있기 때문에, 독자가 비평가의 주관적인 척도나 기호를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잣대처럼 활용할 수만 잇다면, 비평가의 반응을 통해 객관적 가치를 쉽게 읽어내게 된다. 더 간단히 표현하자면 훌륭한 비평가는 개성이 강하고 그것을 스스로 똑똑히 드러내기 때문에 독자는 자기가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어떤 렌즈를 투과하여 들어오는 광선인지를 인지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천재적인 비평가가 어떤 천재 작가를 일평생 거부하고 야유하고 공격하는 그럴 때조차 우리는 그가 작가에게 반응하는 방식을 통해 그 작가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심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p109 그러나 책을 통해 스스로를 도야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해 나가고자 하는 데는 오직 하나의 원칙과 길이 있다. 그것은 읽는 글에 대한 경의, 이해하고자 하는 인내, 수용하고 경청하려는 겸손함이다. 그저 시간이나 때우려고 읽는 사람은 좋은 책을 아무리 많이 읽은들 읽고 돌아서면 곧 잊어버리니, 읽기 전이나 후나 그의 정신은 여전히 빈곤할 것이다. 하지만 친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듯 책을 읽는 사람에게 책들은 자신을 활짝 열어 온전히 그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읽는 것은 흘러가거나 소실되지 않고, 그의 곁에 남고 그의 일부가 되어, 깊은 우정만이 줄 수 있는 기쁨과 위로를 전해주리라.


p120 독자가 세계문학과 생동적인 관계를 맺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정해진 도식이나 교육과정보다는 자신에게 특별히 와 닿는 작품들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길은 사랑으로 걸어야지, 의무로 걷는 길이 아니다. 어떤 작품이 너무나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래서 그걸 모른다는 게 창피해서 억지로 부득부득 읽는다는 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그럴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각자 자연스럽게 끌리는 것을 읽고 알고 사랑하도록 해야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름다운 시에 마음이 끌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역사나 고향 마을의 민담에, 또 다른 이는 민요의 노랫말에 애착을 가진다. 그런가 하면 우리 마음의 감정을 철저히 탐구하고 탁월한 이성으로 해석해놓은 책을 읽을 때 매료되고 뿌듯해지는 이도 있을 것이다.
 길은 수천 가지다. 교과서나 동화책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셰익스피어나 괴테 혹은 단테로 끝낼 수도 있다. 정해진 길은 없으니 각자 마음에 와 닿는 작품을 읽도록 한다. 끌리지 않고 저항감이 일어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작품이라면 억지로 인내하며 애써 읽으려고 하지 말고 도로 내려놓는 편이 낫다. 어린이나 청소년에게도 절대로 특정도서를 읽도록 지나치게 강권해서는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정말 좋은 작품들과, 아니 진정한 독서와 평생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작품, 노래, 기행문, 관찰문 등 무엇이건 자기 마음에 드는 것으로 시작해, 유사한 다른 것들로 점점 확장하도록 하자.


p173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아 온갖 문학작품을 기웃거리며 오늘은 페르시아의 동화, 내일은 북구의 전설, 모레는 미국의 그로테스크 현대문학을 탐욕스럽게 전전하는 것은 실속 없고 위험할 따름이다. 인내심도 안정감도 없이 사방팔방 입맛을 다시면서 제일 맛있고 최고로 향긋하고 특별한 것만 취하려고 하는 사람은 묘사의 아취나 문체에 대한 감각을 망쳐버리게 된다. 그런 독서자는 종종 세련되고 성숙한 예술애호가처럼 보이지만 거의 대부분이 소재적인 측면 아니면 주변적인 특징을 집어내는 데에 그친다. 이런 성급함과 끝없는 사냥질을 하느니 차라리 정반대로 한 작가, 한 시대, 한 사조의 작품들을 오랜 시간을 두고 섭렵하라. 철저히 알아야 진정으로 소유하게 된다. 들썩이는 호기심으로 온갖 시대 온 나라 문학의 별별 습작과 수준미달의 작품들을 꿀꺽꿀꺽 집어삼킨 이보다, 우수한 제 나라 작가 서너 명을 반복하여 완벽하게 읽은 사람이 훨씬 더 풍요로우며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된다. 머릿속 가득 수천 권의 책제목과 작가의 이름을 공허하게 떠올리는 것보다 몇 권 안 되는 책일망정 속속들이 알아 그 책들을 손에 집어드는 순간 그것을 읽던 수많은 시간들의 감동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편이 더 귀하고 만족스러우리라.


p228 진심으로 생각하건대, 작가의 직분이란 세상에서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판별하는 일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의미라는 것이 그저 단어에 불과함을,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없으면서 또한 모든 것에 있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과 그러지 않아도 될 일이 따로 있지 않음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그런 소임, 그런 고결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