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와 엘리자베스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첫 번째 편지 - 1856년 프랑스 용빌, 엠마가 엘리자베스에게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도 이름 모를 촌구석에서, 펜을 쥘 손 조차도 썩어 바스러진 한 가련한 여인이 보내는 편지에 너무 놀라진 마세요. 당신이라면 어떤 당혹스런 상황도 즐거운 재치로 받아 넘길 테니까. 저는 엠마 보바리라는 이름의 어떤 주부랍니다. 아, 주부‘였’지요. 이제는 제 앞의 모든 빛은 꺼져버리고, 끝없는 어둠만이 제 친구이자, 이렇게 가끔 누구에게든 편지를 보내는 일만이 죽음의 시간을 견디는 취미이지요.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려니, 재로 날아간 무수한 한 때의 꿈들이 아련하게나마 떠오르네요. 엘리자베스, 부자와 결혼에 성공한 신데렐라!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면 죄송해요. 부러움의 탄성이었어요. 제가 그렇게나 하루도 빠짐없이 꿈꾸고 바랐던 이상적인 부와 사랑이 합치된 결혼에 성공한 당신! 제 생애 단 한 번의 달콤한 경험이었던 보비에사르 성의 무도회를 당신은 평생 열 수도 있겠죠. 빚을 져 가며 별 것 아닌 사치를 누리던 제게 당신에게는 펨벌리 하나만으로도 최상의 사치를 누릴 수 있는 행운아에요.
왜 제겐 빙리나 다아시 같은 이가 우연히 찾아오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까요? 세계는 제게 꿈과 사랑이 합치되는 행복 대신 샤를르 보바리라는 불행만을 안겨주었어요. 비좁고 싸늘한 집구석에 걸린 못생긴 모자 같은 보바리! 왜 저는 결혼하기까지 그를 잘 알고 사랑하고 있다고까지 생각했을까요. 그 한 번의 착각으로 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거예요. 어떻게든 그 실수를 되돌려보고자 나름대로 물건도 사들이고 이사도 가고 공부나 음악에도 집중해 보려 했으며 무엇보다 아들을 낳길 간절히 바랐어요. 하지만 집안은 점점 쪼들리고 이사한 마을도 지루한 시골이었으며 공부도 음악도 계속 해야 할 의미를 잃었으며 쓸데없이 귀찮기만 한 딸이 태어나고 말았어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이에게까지 애정을 느끼려고 노력했을까요. 환자의 안짱다리가 반듯해지긴 커녕 썩어 문드러졌을 때, 제 애정은 결국 환자의 다리를 절단했듯이 거침없이 잘라냈어요. 제 꿈은 너무나도 크고 아름다워 누구에게도, 어디에서도 꽃 한 번 피워보지 못한 채 추락하고 말았어요.
그리고 불륜…당신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꺼내기가 부끄럽지만, 뭐 어차피 같은 여자끼리 어때요! 게다가 그 대가를 톡톡히 받고도 남았는걸요. 그들, 제 불륜 상대자들을 잠시나마 꿈속의 왕자님이라고 생각했던 게 썩은 늪을 아름다운 호수라 여기며 신나서 발을 담근 격이었지요. 숨 막히는 악취를 벅차오르는 향기라 여기고, 늪의 질척거림을 열정적인 포옹이라 생각한 저를 당신은 경멸하겠지요? 모두 헛된 짓거리지요. 모두 잘못된 것들이에요. 제가 여자로 태어났고, 당신이 받은 행운을 저는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진정으로 여성에게 행복은 오로지 결혼에만 매달려 있는 걸까요? 제 생애는 오로지 끝없는 기다림, 절대적인 행복의 장소로 절 데려다줄 어떤 존재만을 한없이 기다렸어요. 이렇게 여자란 그저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요? 사실 당신도 빙리가 네더필드에 오지 않았다면, 친구 다아시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당신도 당신 언니도 그렇게 조건 좋은 결혼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겠지요. 아닌가요? 미모와 교양밖에 없는 두 여성 중에 왜 한쪽만 결혼으로 두 날개를 얻고 다른 한쪽은 그나마 있던 날개도 꺾여버리고 말았는지, 모든 게 다 소용없어진 뒤에도 궁금하네요.
어쩌다 보니 죄 없는 당신께 부질없는 하소연만 늘어놓고 말았네요. 죽은 뒤에도 이 모양이라니 우습죠? 어떤 불행했던 여자가 지금 행복한 여자에게 보내는 사소한 수다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세요. 답장은 꼭 안 하셔도 되요. 그럼 안녕하시길.
두 번째 편지 - 1813년 영국 펨벌리, 엘리자베스가 엠마에게
솔직히 편지를 받고 놀랐다는 사실을 부인하진 않을게요. 제게 이런 미묘하고도 의미 있는 편지가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주변 사람들은 누군가 제게 장난치는 거라며 무시하라고 했지만, 저는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그래서 이렇게 펜을 들어 답장까지 쓰는 거예요. 프랑스 용빌이란 마을까지 이 편지가 반드시 갈 수 있도록 하겠어요. 그만큼 저는 진지하답니다, 가여운 아가씨. 읽고 난 뒤 당신이 죽었다는 사실과, 당신이 던진 이야기들이 주는 이 슬픔을, 어찌해야 할까요.
처음의 놀라움이 가신 뒤, 당신의 편지를 꼼꼼히 정독했어요. 편지 말미의 당신의 물음, 여성의 행복이 결혼에 달려 있나 라는 중요한 물음, 그래요, 지금 시대의 여성에게 주어진 건 결혼뿐이지요. 결혼이 생의 전부라 할 수 있고, 결혼하고 나면 그나마 열려 있던 기회와 꿈의 문도 굳게 닫히고 말죠. 문제는 그 결혼마저도 행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런 면에서 저도 제가 축복받았다는 걸 매 순간 느끼고 감사하고 있어요. 재산도 없는 중산층 아가씨가, 조금 더 솔직하고 조금 더 독특한 교양으로 부자에 유서 깊은 가문의 남자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다른 여자들의 꿈이 될 만해요.
하지만 당신의 편지를 읽으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어요. 당신에게는 꿈만 있고 당신 자신에 대한 자각은 없었나요? 당신이 살아 있을 적을 떠올려도 기억나는 것이라곤 오로지 기다림뿐이었나요? 꿈을 기다리는 동안의 당신, 현재를 살아가는 당신은 어떠했나요? 당신의 편지에는 온통 꿈과 기다림, 그에 대한 좌절뿐이에요. 제 결혼이 정말 오로지 빙리와 다아시가 네더필드에 왔다는 우연한 행운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만 알고 있었군요! 물론 그가 우리 집 근처에 오게 되어 만날 기회가 생겼다는 것도 사랑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하지만 그 사랑의 과정이란 시작이 좋다고 순순히 흘러가는 애가 아니랍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뭔가 저만의 매력 하나만을 믿고 달려간 건 더더욱 아니구요. 다아시와 제가 맺어지기까지 그 수많은 오만과 편견과 그로 인한 다툼과 편지들이란! 그가 처음 제게 청혼했을 때 제가 거절했다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제가 샤를르 보바리 씨와 비슷한 사람-콜린스 씨에 비하면 샤를르 씨는 아주 점잖으신 분이지요-의 청혼을 받았다는 이야기는요? 심지어 콜린스 씨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아내가 필요하니까, 집안에 들일 아내라는 가구가 체면상 필요하니까 제게 청혼한 거예요! 이 모든 걸 전 제 자신을 위해, 제 자신으로 남아있기 위해 모두 거절했어요. 어떻게 해도 다아시의 오만, 콜린스의 속물 근성 모두 제 솔직함과 쾌활함과는 맞지 않았으니까요.
아무리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당신에겐 다아시와 결혼한 제 모습밖에는 결과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겠지요. 저로서도 다아시와의 결혼에서 그이만 보고 돈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이 되겠지요. 당신이 편지에서 최고의 사치라고 평한 펨벌리를 처음 본 순간 들었던 감정들은, 저답다고 하기보단 보통 여성들과 다를 바 없었다고 해야겠지요. 그리고 거기서 그를 다시 만났어요. 제 편견의 색유리를 깨고 나와서 바라본 그 역시도 무엇인가를 깨고 나온 상태였고, 예전의 그라면 상상도 못할 행동을 보여주었어요. 제게 다시 한 번 더 손을 내밀어준 것이죠! 그렇게 우린 서로를 위해 다시 태어났고, 하나가 되었어요. 이 모든 과정이 있었기에 행복이라는 결과가 꽃핀 거예요. 혹 당신은 어느 날 갑자기 꿈이 단번에 이뤄지기를 바란 것은 아닌지? 꿈은 미래에 있더라도 현재를 사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에요. 풀기 어려운 삶의 비밀이에요. 우리 여자들의 삶에도 언젠가 쉬운 풀이방법이 나오기를 바라며, 당신에게 평온한 안식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