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미완의 독서기록
koala초코
2009. 2. 16. 12:10
1권 스완네 집 쪽으로 1
29p 우리의 사회적 인격이란 남들의 생각이 만들어 낸다. '우리가 아는 사람을 본다'고 하는 단순한 행위마저, 일부는 지적 행위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인간의 외모에, 그 인간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관념을 채우고, 그리고 전체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보았을 때, 그 대부분은 역시 이러한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러한 관념이 그 인간의 뺨을 부풀리고, 콧날을 또렷하게 그려 내고, 목소리 울림 속에, 그것이 일종의 투명한 피막에 지나지 않는 듯이 들어 가 그 울림에 뉘앙스를 섞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그 인간의 얼굴을 보고 듣고 할 때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있는 것은, 실은 이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65p 나는 켈트인의 신앙을 매우 옳다고 생각한다. 켈트인의 신앙에 의하면, 우리가 여읜 이들의 혼이 어떤 하등 동물, 곧 짐승이나 식물이나 무생물 안에 사로잡혀 있어, 우리가 우연히 그 나무의 곁을 지나가거나, 혼이 갇혀 있는 것을 손에 넣거나 하는 날, 이는 결코 많은 사람에게 일어아는 일은 아니지만, 그러한 날이 올 때까지 완전히 잃어져 있다. 그런데 그런 날이 오면 죽은 이들의 혼은 소스라치며 우리를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그 목소리를 알아들으면 마술 결박은 금세 풀린다. 우리에 의해서 해방된 혼은 죽음을 정복하고 우리와 더불어 다시 산다.
우리의 과거도 그와 마찬가지다. 과거의 환기는 억지로 그것을 구하려고 해도 헛수고요, 지성의 온갖 노력도 소용없다. 과거는 지성의 영역 밖,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이 물질적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우연에 달려 있다.
66p 어머니는 과자를 가지러 보냈다. 가리비의 가느다란 흠이 난 조가비 속에 흘려 넣어 구운 듯한, 잘고도 통통한, 프티트 마들렌이라고 하는 과자였다. 그리고 이윽고 우중충한 오늘 하루와 음산한 내일의 예측에 풀죽은 나는, 마들렌의 한 조각이 부드럽게 되어 가고 있는 차를 한 숟가락 기계적으로 입술에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그 쾌감은 사랑의 작용과 같은 투로, 귀중한 정수로 나를 채우고, 그 즉시 나로 하여금 삶의 무상을 아랑곳하지 않게 하고, 삶의 재앙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삶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하였다. 아니, 차라리 그 정수는 내 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범용한, 우연한,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존재라고는 느끼지 않게 되었다. 어디서 이 힘찬 기쁨이 나에게 올 수 있었는가? 기쁨이 차와 과자의 맛과 이어져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런 것을 한없이 초월하고 있어서 도저히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닌 듯싶었다. 어디서 이 기쁨이 왔는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어디서 파악하느냐?
144p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뚫고 들어가게 하는 미지의 삶을 같이하는 인간이 있다는 생각, 바로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생겨나는 온갖 조건 중에서, 사랑에 가장 필요한 것이고, 그 밖의 것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
2권 스완네 집 쪽으로 2
246p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깨닫지 못한다. 아무도 스스로 여기고 있는 만큼 불행하지 않다'고. 그러나 그는 이런 생활이 이미 몇 해 동안 계속되고 있는 것을, 아무리 원한들 결국 이런 생활이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고, 아무런 행복도 가져다 주지 않는 여인과의 만남을 날마다 기대하는 데, 일, 향락, 친구, 마침내 온 생애마저 희생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고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데트와의 사이를 두둔하고 파탄을 막았던 것이 나의 운명을 해친 것이 아닐까, 바람직한 사건은-그 출발처럼-꿈에서밖에 일어나지 않아 기뻐하였던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한 끝에 혼잣말을 했다. 인간은 자신의 불행을 깨닫지 못한다. 아무도 스스로 여기고 있는 만큼 행복하지 않다고.
293p 하지만 이름이란 사람이나 시가의-시가도 그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에 우리에게 늘 인물과 마찬가지로 개성적이며 유일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어떤 어렴풋한 영상을 보인다. 이 영상은 그 이름과 그 이름 소리의 맑거나 침울한 울림으로 색깔을 자아낸다. 영상은 이 색깔에 의해 마치 전지가 온통 푸른색 혹은 붉은색으로 그려진 포스터처럼, 그것도 쓸 재료의 형편이나 손의 제한 때문에, 또는 장식 화가의 변덕 때문에 하늘과 바다뿐만 아니라 쪽배도, 성당도, 통행인도 모조리 푸른색 혹은 붉은색 일색으로 되어 있는 포스터처럼 한결같이 칠해져 있는 것이다.
349p 우리가 안 지 오래 된 곳들은 단지 공간의 세계에 속하는 것만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편의상 공간의 세계에 배치할 따름이다. 그런 곳들은 그 당시의 우리의 삶을 구성하던 잇달린 인상 한가운데 있는 얇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형상에 대한 화상이란, 어떤 한 순간에 대한 그리움에 지나지 않는다. 가옥들도, 길도, 큰 거리도, 덧없는 것, 아아! 세월처럼.
1월에 한 권, 2월에 또 한 권, 예상한 대로 좀처럼 읽는데 속도가 나질 않는다. 하긴, 프루스트가 죽기 직전까지 13년간 썼다는 이 대작을 낼름 읽어치우려는 것도 예의가 아닐려나? 2년 전 1권 10페이지까지 넘기다 포기하고, 다시 집어든 '잃어버린 시간'은 넘어가긴 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까지 까마득하다. 지금 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길을 떠나기에는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7부작의 이정표라는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일단 멈춰서서, 1년 뒤를 기약하련다. 그때 되면 좀 더 편하게 나아갈 수 있으려나........
29p 우리의 사회적 인격이란 남들의 생각이 만들어 낸다. '우리가 아는 사람을 본다'고 하는 단순한 행위마저, 일부는 지적 행위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인간의 외모에, 그 인간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관념을 채우고, 그리고 전체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보았을 때, 그 대부분은 역시 이러한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러한 관념이 그 인간의 뺨을 부풀리고, 콧날을 또렷하게 그려 내고, 목소리 울림 속에, 그것이 일종의 투명한 피막에 지나지 않는 듯이 들어 가 그 울림에 뉘앙스를 섞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그 인간의 얼굴을 보고 듣고 할 때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있는 것은, 실은 이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65p 나는 켈트인의 신앙을 매우 옳다고 생각한다. 켈트인의 신앙에 의하면, 우리가 여읜 이들의 혼이 어떤 하등 동물, 곧 짐승이나 식물이나 무생물 안에 사로잡혀 있어, 우리가 우연히 그 나무의 곁을 지나가거나, 혼이 갇혀 있는 것을 손에 넣거나 하는 날, 이는 결코 많은 사람에게 일어아는 일은 아니지만, 그러한 날이 올 때까지 완전히 잃어져 있다. 그런데 그런 날이 오면 죽은 이들의 혼은 소스라치며 우리를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그 목소리를 알아들으면 마술 결박은 금세 풀린다. 우리에 의해서 해방된 혼은 죽음을 정복하고 우리와 더불어 다시 산다.
우리의 과거도 그와 마찬가지다. 과거의 환기는 억지로 그것을 구하려고 해도 헛수고요, 지성의 온갖 노력도 소용없다. 과거는 지성의 영역 밖,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이 물질적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우연에 달려 있다.
66p 어머니는 과자를 가지러 보냈다. 가리비의 가느다란 흠이 난 조가비 속에 흘려 넣어 구운 듯한, 잘고도 통통한, 프티트 마들렌이라고 하는 과자였다. 그리고 이윽고 우중충한 오늘 하루와 음산한 내일의 예측에 풀죽은 나는, 마들렌의 한 조각이 부드럽게 되어 가고 있는 차를 한 숟가락 기계적으로 입술에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그 쾌감은 사랑의 작용과 같은 투로, 귀중한 정수로 나를 채우고, 그 즉시 나로 하여금 삶의 무상을 아랑곳하지 않게 하고, 삶의 재앙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삶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하였다. 아니, 차라리 그 정수는 내 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범용한, 우연한,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존재라고는 느끼지 않게 되었다. 어디서 이 힘찬 기쁨이 나에게 올 수 있었는가? 기쁨이 차와 과자의 맛과 이어져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런 것을 한없이 초월하고 있어서 도저히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닌 듯싶었다. 어디서 이 기쁨이 왔는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어디서 파악하느냐?
144p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뚫고 들어가게 하는 미지의 삶을 같이하는 인간이 있다는 생각, 바로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생겨나는 온갖 조건 중에서, 사랑에 가장 필요한 것이고, 그 밖의 것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
2권 스완네 집 쪽으로 2
246p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깨닫지 못한다. 아무도 스스로 여기고 있는 만큼 불행하지 않다'고. 그러나 그는 이런 생활이 이미 몇 해 동안 계속되고 있는 것을, 아무리 원한들 결국 이런 생활이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고, 아무런 행복도 가져다 주지 않는 여인과의 만남을 날마다 기대하는 데, 일, 향락, 친구, 마침내 온 생애마저 희생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고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데트와의 사이를 두둔하고 파탄을 막았던 것이 나의 운명을 해친 것이 아닐까, 바람직한 사건은-그 출발처럼-꿈에서밖에 일어나지 않아 기뻐하였던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한 끝에 혼잣말을 했다. 인간은 자신의 불행을 깨닫지 못한다. 아무도 스스로 여기고 있는 만큼 행복하지 않다고.
293p 하지만 이름이란 사람이나 시가의-시가도 그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에 우리에게 늘 인물과 마찬가지로 개성적이며 유일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어떤 어렴풋한 영상을 보인다. 이 영상은 그 이름과 그 이름 소리의 맑거나 침울한 울림으로 색깔을 자아낸다. 영상은 이 색깔에 의해 마치 전지가 온통 푸른색 혹은 붉은색으로 그려진 포스터처럼, 그것도 쓸 재료의 형편이나 손의 제한 때문에, 또는 장식 화가의 변덕 때문에 하늘과 바다뿐만 아니라 쪽배도, 성당도, 통행인도 모조리 푸른색 혹은 붉은색 일색으로 되어 있는 포스터처럼 한결같이 칠해져 있는 것이다.
349p 우리가 안 지 오래 된 곳들은 단지 공간의 세계에 속하는 것만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편의상 공간의 세계에 배치할 따름이다. 그런 곳들은 그 당시의 우리의 삶을 구성하던 잇달린 인상 한가운데 있는 얇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형상에 대한 화상이란, 어떤 한 순간에 대한 그리움에 지나지 않는다. 가옥들도, 길도, 큰 거리도, 덧없는 것, 아아! 세월처럼.
1월에 한 권, 2월에 또 한 권, 예상한 대로 좀처럼 읽는데 속도가 나질 않는다. 하긴, 프루스트가 죽기 직전까지 13년간 썼다는 이 대작을 낼름 읽어치우려는 것도 예의가 아닐려나? 2년 전 1권 10페이지까지 넘기다 포기하고, 다시 집어든 '잃어버린 시간'은 넘어가긴 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까지 까마득하다. 지금 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길을 떠나기에는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7부작의 이정표라는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일단 멈춰서서, 1년 뒤를 기약하련다. 그때 되면 좀 더 편하게 나아갈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