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한 권의 책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koala초코 2009. 8. 9. 12:43
 김용석의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를 읽고 알게 된 아름다운 철학서//

17p 근원어 '나-너'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해질 수 있다. 온 존재에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18p 현재란 단지 생각 속에서 그때그때 '지나가는'시간을 고정시킨 종점으로서의 하나의 점이라든가, 또는 겉보기로만 고정시킨 경과를 가리키는 하나의 점 같은 것이 아니다. 참되고 충만한 현재는 현전하는 것, 만남, 관계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오직 '너'가 현전하게 됨으로써만 현재는 생성되는 것이다.
 근원어 '나-그것'의 '나', 측 하나의 '너'에 대하여 몸으로 마주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내용'으로 둘려 있는 '나'에게는 과거가 있을 뿐이며 현재가 없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자기가 경험하며 사용하고 있는 사물에 만족하고 있는 한 과거에 살고 있는 것이며, 그의 순간은 현재가 없는 순간이다. 그는 대상밖에 가진 것이 없다. 그러나 대상의 본질은 있었다고 하는 데 있는 것이다.
 현재는 덧없는 것,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주 기다리며 마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21p 그러나 사랑은 하나이다. 감정은 '소유'되지만 사랑은 생겨난다. 감정은 사람 안에 깃들지만 사람은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다. 즉 사랑은 '나'에 집착하여 '너'를 단지 '내용'이라든가 대상으로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나'와 '너' '사이'에 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 곧 그의 존재를 기울여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아니면 비록 그가 체험하고, 경험하고, 향수하고, 표현하는 감정을 사랑에 돌린다 하여도 그는 사랑을 모른다. 사랑이란 하나의 우주적인 작용이다.

68p 이 관계의 세계 속에서 사람은 자기의 존재 및 보편적 존재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관계를 알며 '너'의 현존을 아는 사람만이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결단하는 사람만이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는 '너'의 면전에 나아간 것이기 때문이다.

78p 자유인이란 자의에 속박되지 않고 의욕하는 사람이다. 그는 현실을 보고 있다. 즉 '나'와 '너'의 실재하는 두 존재의 실재적인 결합을 믿고 있다. 그는 운명을 믿으며, 그것이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믿는다. 운명은 그를 마음대로 부리지 않는다. 운명은 그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는 그것을 향해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운명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의 온 존재를 기울여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며, 그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의 결단이 의도하는 대로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어날 것은 그가 의욕할 수 있는 것을 향하여 결단할 때에만 일어날 것이다. 그는 사물이나 충동에 지배되고 잇는 그의 작은 의지, 부자유한 의지를 그의 큰 의지를 위하여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운명지워진 것을 떠나서 운명에로 나아가는 큰 의지를 위하여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에 그는 더 이상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사물을 그냥 되어지는 대로 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생성되어 나오는 것, 곧 세계에 있어서의 존재의 길을 엿듣는다. 그 길에 의하여 운반되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그의 참여를 필요로 하고 있는 생성을, 그것이 그에 의하여 실현되기를 바라는 대로, 사람인 그의 정신과 행위로써, 그의 삶과 죽음으로써 실현하기 위하여서이다. 자유인이란 믿는 사람이라고 내가 말했거니와 이 말의 뜻은 '그는 만난다'는 것이다.

169p 학생의 인품 속에 있는 최선의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도와 주려면 교사는 학생을 그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과 현재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특정한 인격으로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교사는 학생을 여러 가지 특성이나 성향, 억압의 한갓된 총화로 알아서는 안 된다. 교사는 학생을 하나의 전체로서 마음에 두고 그를 이러한 그의 전체성에서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교사는 이것을 그가 일종의 양극적인 상황에서 그때마다 학생을 자신의 짝으로서 만날 때에만 이룩할 수 있다. 그리고 학생에 대한 그의 영향이 통일적으로 의미있는 것이 되려면 그는 이 양극적 상황을 그때마다 단지 자기 자신의 극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상대편 극에서도 그의 전요소에 걸쳐서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내가 얼싸안음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실현을 이룩해야만 한다. 이것은 물론 그가 학생 속에서도 '나-너-관계'를 불러일으키는 일, 따라서 학생 쪽에서도 똑같이 교사를 특정한 인격으로 여기고 긍정하느냐에 달려 있지만, 그러나 만일 학생이 자기 편에서도 이러한 얼싸안음을 행한다면, 그리하여 공통의 상황에 있어서의 교사의 역할을 학생이 체험한다면, 교육이라는 특수한 관계는 존립할 수 없을 것이다. '나-너-관계'가 이제 종식되건, 또는 우정이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성질을 얻게 되건, 어떻든 그 결과 분명해지는 것은 교육이라는 특별한 관계에서는 그 자체 완전한 상호성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