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왜 나는 하루키를 좋아하는가

koala초코 2010. 7. 18. 13:21
출간되자마자 단숨에 베스트셀러로 진입, 지금도 계속해서 읽혀지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왜 우리는 하루키에 열광하는가,
 
왜 나는 하루키를 읽는가

 

1권 380p 이야기의 숲에서는 사물 간의 관련성이 제 아무리 명백하게 묘사되어 있어도 명쾌한 해답이 주어지는 일은 없다. 그것이 수학과의 차이다. 이야기의 역할을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문제를 다른 형태로 바꿔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동의 질이나 방향성을 통해, 해답의 방식을 이야기 형식으로 암시해준다. 덴고는 그 암시를 손에 들고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그 암시는 주문이 적힌 종이쪽지 같은 것이다. 때로 그것은 모순을 지니고 있어서 곧바로 실제에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언젠가 나는 이 주문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이 그의 마음을,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덥혀준다.

 

 그건 그의 주문이 너무나도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숲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산책하기 좋아 보이는 입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숨 막힐 정도로 복잡하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번 소설도 읽고 나면 한없이 차오르는 Question mark에 정신이 없다. 소설 속 두 주인공 아오마메와 덴고를 중심으로 끝도 없이 뿌리내리는 이야기의 나무...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하늘에 뜨는 두 개의 달, 종교단체 선구, 리틀 피플의 존재, 후카에리, 공기 번데기, 버드나무 저택의 노파와 다마루, 1984, 빅 브라더, 1Q84. 

 

1권 240p 1Q84년. 이 새로운 세계를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아오마메는 그렇게 정했다.

 Q는  Question mark의 Qek. 의문을 안고 있는 것.

 그녀는 걸으면서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좋든 싫든 나는 지금 이 '1Q84년'에 몸을 두고 있다. 내가 알고 있던 1984년은 이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1Q84년이다. 공기가 바뀌고 풍경이 변했다. 나는 이 물음표 딸린 세계의 존재 양식에 되도록 빨리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숲에 내던져진 동물과 똑같다. 내 몸을 지키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 장소의 룰을 한시라도 빨리 이해하고 거기에 맞춰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루키의 숲에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세계의 변화, 그의 소설을 읽으면 공기가 바뀌고 풍경이 변한다. 그의 이야기는 세계를 조금씩이나마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그 미묘한 느낌이 나는 너무나도 좋다.

 와인을 홀짝이며 재즈를 듣는 '된장남스런'그의 주인공들의 허세가 역겨워 하루키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도 아직은 하루키 특유의(?) 거침없는 성적인 묘사들은 부담스럽고 이해하기 싫다(도대체 왜 이 장면이 여기서 나오는거지?!?). 하지만 한없이 재미있다. 그런 이유로 하루키를 읽는다. 모름지기, 문학은 '이 작품은 이거야'라는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닌 '나는 이렇게 읽었어'라고 말해야 하는 존재이니까. '나는 [1Q84]를 재미있게 읽었어.'

 


붙임 1.

[1Q84] 3권이 얼마 전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정말 의욕적인 작가님이시다..ㅋ

 

그리고 애독자에게 열심히 쓰는 작가만큼 좋은 작가도 없다.

 

붙임 2. 출처_시사in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5990

 

[문학 내에서도 문제적인 작품]김연수/시사in/2010.2.23

2009년이 되어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먼저 내게. 그 다음으로는 무라카미 본인에게. 나는 1991년에 그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첫 소설은 그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으라>였다. 흥미로운 소설이라고 생각해서 한 권 더 읽었다. 예의 그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그 소설에 그만 푹 빠져버렸다. 소설 읽는 재미에 막 빠져드는 20대 초반 학생이라면 이런 일은 한 달에 한 번씩 일어난다. 그러니까 왜 이런 작가를 몰랐는가 하는 탄식과 함께 이전에 나온 그의 소설을 찾기 위해서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일. 도서관은 넓고, 내가 읽지 못한 좋은 작가는 수없이 많은 법이니까.

 

하지만 이제 무라카미는 예외로, 그중에서도 아주 특수한 예외로 꼽아야만 할 것 같다. 일단 내게는. 20년 전에 나는 당연하게도 많은 소설가의 작품을 읽었다. 그때 이미 죽은 작가도 있었고, 지금은 고인이 된 작가도 있으며, 아직까지 살아서 글을 쓰는 작가도, 또 그다지 글을 많이 쓰지 않는 작가도 있다. 아무튼 그때나 지금이나 작가는 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읽었던 작가 중에서 지금도 열렬하게 그의 신작을 기다릴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열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작가의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으리라.

나한테 무라카미 같은 작가가 있어서 좋다. 하지만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은 무라카미 본인일 것이다. 20년 전에 비하면 그는 작가로서 엄청나게 성장했다. 거의 90%에 가까운 작가들의 대표작이 데뷔작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무라카미는 2000년대 들어 늘 지금 쓰고 있는 게 대표작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태엽 감는 새>도 대단했지만 <해변의 카프카>도 엄청났다. 그리고 올해 <1Q84> 1·2권이 나왔다. 내년에 3권이 출간될 예정이라는 <1Q84>를 보노라면 그가 대작 강박증에 사로잡힌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도 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무라카미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속으로 응원까지 한다. 지금 시대에 이렇게 두꺼운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를 지지한다. 게다가 그는 30년 가까이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을 쓰는 중이다. ‘~중이다’라는 부분에 방점을 찍는다. 그간 그의 적들은 무라카미 같은 사람이 쓰는 소설이 소설의 죽음을 앞당길 것이라고 비판했는데, 그는 죽은 건 ‘어떤 소설들’이라는 걸 올해에도 증명했다. 이로써 그의 소설은 문학 내부에서도 문제적인 작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