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금빛 잉어의 꿈
koala초코
2008. 12. 12. 11:51
연말에 줄줄이 이어지는 결혼식에 몇 번 다녀왔다. 이젠 더 이상 내 눈에 결혼식이 아득한 꿈으로만 비춰지지 않는 나이, 어른이 되면 독신으로 살겠다고 아득바득 우겨대던 한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맹세의 덧없음이 얼마나 우습던지. 턱밑까지 어른됨이 차 오르고 나니, 더 이상 혼자라는 조건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삶이란 아는 것과 직접 사는 것이 현저히 다른 그 무엇인가 보다.
- 삶을 사는 것과 삶을 아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불꽃놀이>
십 년도 더 된 글들이지만 어떤 글보다도 더 절실히 다가오는 오정희의 문장들. 이 땅에서 소녀로, 여성으로, 아내로,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녀의 주인공들처럼 삶의 공허를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그렇기에 오히려 한층 더 일상에 집착해야 하는 존재가 여자인가? [불꽃놀이]와 함께 과제 때문에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같이 읽자니, 여성의 운명이라는 주제가 한층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 여자로서 얽매인 규제 속에 답답해하다 사치와 간통이라는 비루한 탈출구로 빠져들어 결국 파멸하고 마는 엠마 보바리. 완벽한 일상과 가정 속에서 삶의 균열, 혹은 자기 자신의 균열을 애써 무시하는 오정희의 그녀들.
- 누구나 젊은 한 시절 자신을 전설 속의, 멸종된 종으로 여기지 않겠는가. 관습과 제도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두려움과 항거를 그렇게 나타내지 않겠는가.
우리 삶의 풍속은 그만큼 빈약한 상상력에 기대어 부박한다. 삶이 내게 도태시킨 가능성에 대해 별반 아쉬움도 없이 잠깐 생각해본 것은 내가 새로 보태어진 나이테에 잠깐 발이 걸렸다는 뜻일 게다.
- 추억이란 물 속에서 건져낸 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물 속에서 갖가지 빛깔로 아름답던 것들도 물에서 건져내면 평범한 무늬와 결을 내보이며 삭막하게 말라가는 하나의 돌일 뿐. 우리가 종내 무덤 속의 흰 뼈로 남듯. 돌에게 찬란한 무늬를 입히는 것은 물과 시간의 흐름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종종 이즈음에도 옛우물과 금빛 잉어의 꿈을 꾼다.
<옛우물>
내가 만약 어떤 남자의 아내가 되고 어떤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면, 가정을 가지게 된다면,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하고 어떤 마음을 가질까. 애써 떠올려보려 해도 지금으로서는 소꿉장난식의 공상 그 이상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이렇게나 반복되는 일상에 가슴이 쥐어뜯기는데, 내 평생의 길이 정해져 버렸다는 선고를 받게 되면, 난 살아날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할 일은 아니다. 다만 어렸을 적 꾸었던 수많은 꿈들이 빛이 바래 내 발밑에 한줌 먼지로 사그라질 순간의 가능성에 답답해진다. 만약 그런 때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가 던진 물음들이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 세상이, 삶이 몇 개의 아름답고 단아한 문장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또한 자신에게는 그것을 깨뜨릴 파괴적 에너지가 없다는 자각이(오히려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어렴풋이 들어서면서부터 쓰는 일에 자신을 잃었다. 열망도, 욕망도, 문학을 인생이 향유할 수 있는 아름다움 중의 한몫으로 즐기리라는 자족감 속에 자연스레 사그라들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마치 벙어리의 소리치려는 충동처럼, 혀가 굳어가는 안타까움과 같은 뒤늦은 열망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엇이 남편과 아이들을 향해 소설을 쓰고 싶어 혼자서라도 돌아가겠노라고 당당히 말하게 한 걸까. 잃어져가는 말에 대한 복수일까, 사랑일까. <파로호>
- 삶을 사는 것과 삶을 아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불꽃놀이>
십 년도 더 된 글들이지만 어떤 글보다도 더 절실히 다가오는 오정희의 문장들. 이 땅에서 소녀로, 여성으로, 아내로,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녀의 주인공들처럼 삶의 공허를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그렇기에 오히려 한층 더 일상에 집착해야 하는 존재가 여자인가? [불꽃놀이]와 함께 과제 때문에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같이 읽자니, 여성의 운명이라는 주제가 한층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 여자로서 얽매인 규제 속에 답답해하다 사치와 간통이라는 비루한 탈출구로 빠져들어 결국 파멸하고 마는 엠마 보바리. 완벽한 일상과 가정 속에서 삶의 균열, 혹은 자기 자신의 균열을 애써 무시하는 오정희의 그녀들.
- 누구나 젊은 한 시절 자신을 전설 속의, 멸종된 종으로 여기지 않겠는가. 관습과 제도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두려움과 항거를 그렇게 나타내지 않겠는가.
우리 삶의 풍속은 그만큼 빈약한 상상력에 기대어 부박한다. 삶이 내게 도태시킨 가능성에 대해 별반 아쉬움도 없이 잠깐 생각해본 것은 내가 새로 보태어진 나이테에 잠깐 발이 걸렸다는 뜻일 게다.
- 추억이란 물 속에서 건져낸 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물 속에서 갖가지 빛깔로 아름답던 것들도 물에서 건져내면 평범한 무늬와 결을 내보이며 삭막하게 말라가는 하나의 돌일 뿐. 우리가 종내 무덤 속의 흰 뼈로 남듯. 돌에게 찬란한 무늬를 입히는 것은 물과 시간의 흐름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종종 이즈음에도 옛우물과 금빛 잉어의 꿈을 꾼다.
<옛우물>
내가 만약 어떤 남자의 아내가 되고 어떤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면, 가정을 가지게 된다면,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하고 어떤 마음을 가질까. 애써 떠올려보려 해도 지금으로서는 소꿉장난식의 공상 그 이상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이렇게나 반복되는 일상에 가슴이 쥐어뜯기는데, 내 평생의 길이 정해져 버렸다는 선고를 받게 되면, 난 살아날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할 일은 아니다. 다만 어렸을 적 꾸었던 수많은 꿈들이 빛이 바래 내 발밑에 한줌 먼지로 사그라질 순간의 가능성에 답답해진다. 만약 그런 때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가 던진 물음들이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 세상이, 삶이 몇 개의 아름답고 단아한 문장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또한 자신에게는 그것을 깨뜨릴 파괴적 에너지가 없다는 자각이(오히려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어렴풋이 들어서면서부터 쓰는 일에 자신을 잃었다. 열망도, 욕망도, 문학을 인생이 향유할 수 있는 아름다움 중의 한몫으로 즐기리라는 자족감 속에 자연스레 사그라들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마치 벙어리의 소리치려는 충동처럼, 혀가 굳어가는 안타까움과 같은 뒤늦은 열망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엇이 남편과 아이들을 향해 소설을 쓰고 싶어 혼자서라도 돌아가겠노라고 당당히 말하게 한 걸까. 잃어져가는 말에 대한 복수일까, 사랑일까. <파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