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문학공부센터
32년생 젊은 소설가 에코의 고백
koala초코
2011. 8. 7. 14:45
p63 텍스트는 모델 독자를 만들기 위해 고안된 장치이다. 모델 독자는 '무조건 옳은' 추측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텍스트는 모델 독자에게 무한하고 다양한 추측을 유도할 수 있다. 경험적 독자는 텍스트가 상정한 모델 독자에 대해 추측하는 배우에 불과하다. 텍스트의 의도는 기본적으로 텍스트를 추측할 수 있는 모델 독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모델 독자의 과제는 경험적 작가가 아닌, 궁극적으로 텍스트의 의도와 일치하는 모델 작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p64 이렇게 모든 독해 행위는 독자의 능력(독자가 갖고 있는 지식의 수준)과 주어진 글의 경제적 능력(즉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확대하면서도 문맥을 통해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이다.
p108 결국 나는 문제를 가벼이 넘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상상해보고 눈물 흘리는 것과 안나 카레니나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두 경우 모두 우리가 가능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첫 번째 경우는 우리의 상상 속 세계이고, 두 번째 경우는 톨스토이가 설계한 세계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 세상을 떠났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마치 악몽을 꾸다 깨어난 것처럼 크게 안도할 것이다. 반면 안나 카레니나가 죽었냐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꼼짝없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한다. 가능 세계안에서 안나가 자살을 감행한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p163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햄릿과 로버트 조던, 그리고 안드레이 공작은 죽는다.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갈망하건, 혹은 무엇을 희망하건 상관없이, 그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고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깨닫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우리는 운명의 손길을 느끼며 전율한다. 우리는 에이햅이 흰 고래를 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비딕]의 진짜 교훈은 고래는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다. 위대한 비극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갖는 이유는 주인공들이 극악한 운명에서 도망치는 대신, 제 손으로 팠던 수렁의 깊은 심연 속으로 뛰어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하는 이유는 자기 앞에 놓인 운명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맹목적으로 달려간 곳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는 또렷이 볼 수 있지만 그들을 막지 못한다.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세계에 인지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에 관한 모든 사정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렇듯 현실 세계에 기생하고 있으면서도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허구적 등장인물들은 현실 세계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다.
이런 문제는 엉뚱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상상할 수 있다면 어머니와 결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허구적 등장인물들은 불완전한 세계, 혹은 좀 더 불손하게 말해서 '불구'의 세계 안에 산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을 정확히 이해하면서, 우리는 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도 빈번히 이러한 운명에 직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허구적 등장인물들이 그들의 세계를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우리의 실질적 세계관이 허구적 등장인물들의 세계관만큼 불완전할지도 모른다고 암시한다. 바로 이 때문에 유명한 '허구적' 등장인물들은 '사실적'인간 조건의 최고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p271 목록 : 읽고 쓰는 즐거움, 이것이 바로 젊은 소설가의 고백이다.
p64 이렇게 모든 독해 행위는 독자의 능력(독자가 갖고 있는 지식의 수준)과 주어진 글의 경제적 능력(즉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확대하면서도 문맥을 통해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이다.
p108 결국 나는 문제를 가벼이 넘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상상해보고 눈물 흘리는 것과 안나 카레니나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두 경우 모두 우리가 가능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첫 번째 경우는 우리의 상상 속 세계이고, 두 번째 경우는 톨스토이가 설계한 세계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 세상을 떠났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마치 악몽을 꾸다 깨어난 것처럼 크게 안도할 것이다. 반면 안나 카레니나가 죽었냐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꼼짝없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한다. 가능 세계안에서 안나가 자살을 감행한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p163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햄릿과 로버트 조던, 그리고 안드레이 공작은 죽는다.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갈망하건, 혹은 무엇을 희망하건 상관없이, 그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고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깨닫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우리는 운명의 손길을 느끼며 전율한다. 우리는 에이햅이 흰 고래를 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비딕]의 진짜 교훈은 고래는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다. 위대한 비극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갖는 이유는 주인공들이 극악한 운명에서 도망치는 대신, 제 손으로 팠던 수렁의 깊은 심연 속으로 뛰어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하는 이유는 자기 앞에 놓인 운명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맹목적으로 달려간 곳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는 또렷이 볼 수 있지만 그들을 막지 못한다.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세계에 인지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에 관한 모든 사정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렇듯 현실 세계에 기생하고 있으면서도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허구적 등장인물들은 현실 세계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다.
이런 문제는 엉뚱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상상할 수 있다면 어머니와 결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허구적 등장인물들은 불완전한 세계, 혹은 좀 더 불손하게 말해서 '불구'의 세계 안에 산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을 정확히 이해하면서, 우리는 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도 빈번히 이러한 운명에 직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허구적 등장인물들이 그들의 세계를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우리의 실질적 세계관이 허구적 등장인물들의 세계관만큼 불완전할지도 모른다고 암시한다. 바로 이 때문에 유명한 '허구적' 등장인물들은 '사실적'인간 조건의 최고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p271 목록 : 읽고 쓰는 즐거움, 이것이 바로 젊은 소설가의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