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독서/한 권의 책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koala초코
2011. 12. 4. 14:57
p19 소설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대체로 늘 이런 대답을 한다.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라고.
소설가는 왜 많은 것을 관찰해야만 할까? 많은 것을 올바로 관찰하지 않으면 많은 것을 올바로 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가령 아마미의 검정 토끼 관찰을 통해 볼링공을 묘사하는 경우라도. 그렇다면 판단은 왜 조금만 내릴까?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쪽은 늘 독자이지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역할은 마땅히 내려야 할 판단을 가장 매력적인 형태로 만들어서 독자에게 은근슬쩍(폭력적이라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건네주는 데 있다.
잘 아시겠지만, 소설가가(귀찮아서 혹은 단순히 자기 과시를 위해)그 권리를 독자에게 넘기지 않고 자기가 직접 매사를 이래저래 판단하기 시작하면, 소설은 일단 따분해진다. 깊이가 사라지고 어휘가 자연스러운 빛을 잃어 이야기가 제대로 옴짝하지 못한다.
소설가가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지극히 간단히 말하자면, 결론을 준비하기보다는 그저 정성껏 계속해서 가설을 쌓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가설들을, 마치 잠든 고양이를 안아들 때처럼, 살그머니 들어올려(나는 '가설'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늘 곤히 자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따스하고 보드랍고 포슬포슬한, 의식이 없는 고양이) 이야기라는 아담한 광장 한가운데에 하나씩 하나씩 쌓아올린다. 얼마나 유효하고 올바르게 고양이=가설을 가려내어, 얼마나 자연스럽고 솜씨 좋게 쌓을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역량이 된다.
<자기란 무엇인가-혹은 맛있는 굴튀김 먹는 법>
p91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인적인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내가 소설을 쓸 때 늘 마음속에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종이에 써서 벽에 붙여놓지는 않았습니다만 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벽이 옳고 알이 그르더라도, 그래도 나는 알 편에 설 것입니다. 옳고 그름은 다른 누군가가 결정할 일입니다. 혹은 시간이나 역사가 결정할 일입니다. 혹시라도 소설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벽 쪽에 서서 작품을 썼다면, 과연 그 작가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요?
<벽과 알-예루살렘상 수상 인사말>
p406 텔로니어스 멍크는 내가 가장 경애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인데, "당신의 연주는 어떻게 그렇게 특별하게 울리나요?"라는 질문에 그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가리키며 이렇게 대답했다.
"새로운 음은 어디에도 없어. 건반을 봐, 모든 음은 이미 그 안에 늘어서 있지. 그렇지만 어떤 음에다 자네가 확실하게 의미를 담으면, 그것이 다르게 울려퍼지지.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담는 거야."
소설을 쓰면서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 우리 앞에는 아직도 드넓은 미지의 지평이 펼쳐져 있다. 그곳에는 비옥한 대지가 개척을 기다리고 있다.
<다른 울림을 찾아서>
p418 압도적이라고 할 만큼 자본주의적인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치와 형식과 물질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무형의 개인적 가치를 찾아내고자 합니다. 그것은 물론 당연한 욕구이며, 소설가는 그러한 '무형의 것'을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치환하여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치환'의 확실하고도 뛰어난 유효성이야말로 소설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작업을 몇 천년에 걸쳐 세계 안에서 실행해왔습니다.
종교 역시 대체로 비슷한 기능을 맡아왔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성직자는 그들 나름의 이야기적 시스템을 사람들에게 제시하여 사람들의 정신이 자리할 곳을 그곳에 다져갑니다. 다만 종교는 소설보다 훨씬 더 강력한 규범과 헌신을 사람들에게 요구합니다. 따라서 그 종교가 컬트적인 색채를 띨 때 거기에는 위험한 흐름이 생겨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부자연스러운 흐름이 조성되는 사태를 최대한 저지하는 것도 소설이 맡은 책무가 아닐까, 옴진리교 신자와 만난 후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사람들의 영혼을 안전한 (적어도 위험하지 않은) 장소로 데려가 자연스럽게 연착륙하는 일입니다.
<포스트코뮤니즘 세계로부터의 질문>
소설가는 왜 많은 것을 관찰해야만 할까? 많은 것을 올바로 관찰하지 않으면 많은 것을 올바로 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가령 아마미의 검정 토끼 관찰을 통해 볼링공을 묘사하는 경우라도. 그렇다면 판단은 왜 조금만 내릴까?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쪽은 늘 독자이지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역할은 마땅히 내려야 할 판단을 가장 매력적인 형태로 만들어서 독자에게 은근슬쩍(폭력적이라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건네주는 데 있다.
잘 아시겠지만, 소설가가(귀찮아서 혹은 단순히 자기 과시를 위해)그 권리를 독자에게 넘기지 않고 자기가 직접 매사를 이래저래 판단하기 시작하면, 소설은 일단 따분해진다. 깊이가 사라지고 어휘가 자연스러운 빛을 잃어 이야기가 제대로 옴짝하지 못한다.
소설가가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지극히 간단히 말하자면, 결론을 준비하기보다는 그저 정성껏 계속해서 가설을 쌓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가설들을, 마치 잠든 고양이를 안아들 때처럼, 살그머니 들어올려(나는 '가설'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늘 곤히 자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따스하고 보드랍고 포슬포슬한, 의식이 없는 고양이) 이야기라는 아담한 광장 한가운데에 하나씩 하나씩 쌓아올린다. 얼마나 유효하고 올바르게 고양이=가설을 가려내어, 얼마나 자연스럽고 솜씨 좋게 쌓을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역량이 된다.
<자기란 무엇인가-혹은 맛있는 굴튀김 먹는 법>
p91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인적인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내가 소설을 쓸 때 늘 마음속에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종이에 써서 벽에 붙여놓지는 않았습니다만 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벽이 옳고 알이 그르더라도, 그래도 나는 알 편에 설 것입니다. 옳고 그름은 다른 누군가가 결정할 일입니다. 혹은 시간이나 역사가 결정할 일입니다. 혹시라도 소설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벽 쪽에 서서 작품을 썼다면, 과연 그 작가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요?
<벽과 알-예루살렘상 수상 인사말>
p406 텔로니어스 멍크는 내가 가장 경애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인데, "당신의 연주는 어떻게 그렇게 특별하게 울리나요?"라는 질문에 그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가리키며 이렇게 대답했다.
"새로운 음은 어디에도 없어. 건반을 봐, 모든 음은 이미 그 안에 늘어서 있지. 그렇지만 어떤 음에다 자네가 확실하게 의미를 담으면, 그것이 다르게 울려퍼지지.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담는 거야."
소설을 쓰면서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 우리 앞에는 아직도 드넓은 미지의 지평이 펼쳐져 있다. 그곳에는 비옥한 대지가 개척을 기다리고 있다.
<다른 울림을 찾아서>
p418 압도적이라고 할 만큼 자본주의적인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치와 형식과 물질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무형의 개인적 가치를 찾아내고자 합니다. 그것은 물론 당연한 욕구이며, 소설가는 그러한 '무형의 것'을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치환하여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치환'의 확실하고도 뛰어난 유효성이야말로 소설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작업을 몇 천년에 걸쳐 세계 안에서 실행해왔습니다.
종교 역시 대체로 비슷한 기능을 맡아왔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성직자는 그들 나름의 이야기적 시스템을 사람들에게 제시하여 사람들의 정신이 자리할 곳을 그곳에 다져갑니다. 다만 종교는 소설보다 훨씬 더 강력한 규범과 헌신을 사람들에게 요구합니다. 따라서 그 종교가 컬트적인 색채를 띨 때 거기에는 위험한 흐름이 생겨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부자연스러운 흐름이 조성되는 사태를 최대한 저지하는 것도 소설이 맡은 책무가 아닐까, 옴진리교 신자와 만난 후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사람들의 영혼을 안전한 (적어도 위험하지 않은) 장소로 데려가 자연스럽게 연착륙하는 일입니다.
<포스트코뮤니즘 세계로부터의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