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친독서

피부 아래 숨겨진 것은 나는 종종 공포영화, 그중에서도 고어 물을 즐겨 본다. 목과 팔다리가 잘리고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볼 때마다 나는 신기하다. 익숙한 우리의 피부를 단 한 겹만 벗기면 드러나는 낯선 풍경, 혈관과 근육과 뼈들, 내장들, 그것은 나인데 내가 아니다. 내 아래 존재하는 세계지만 우리는 그 세계와 마주한 순간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다. 힐러리 맨틀의 단편집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이것이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여기는 이 세계란 얼마나 위태로운가, 피부와도 같은 연약한 껍질에 간신히 유지되고 있을 뿐인데. 읽으면서 가장 소름이 돋았던 단편 와 의 태연하고도 잔인한 문장들, 65쪽, 메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운명, 그러니까 두들겨 맞고, 몸이 뒤틀리고, 가죽이 벗겨지는 운명들을 지루하게 곱씹었.. 더보기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단순한 에로티시즘 소설인가? 채털리 부인의 연인 1 - D.H. 로렌스 지음, 이인규 옮김/민음사 -2권235쪽, 세상이 결코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 딱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섹스를 솔직하고 깨끗이 드러내는 행위이지요. 더럽게 감추며 욕하는 것은 얼마든지 해도 괜찮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섹스를 더럽히고 욕할수록 그만큼 더 섹스를 좋아하지요. 하지만 만약 당신이 자신의 섹스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믿고 그것을 더럽히려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여지없이 당신을 거꾸러뜨리고 말 겁니다. 그건 정신 나간 금기 사항 중 아직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지요. 즉, 절대 섹스를 자연스럽고 생명의 원천이 되는 행위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이 달고 다닌 각종 오해와 오역, 오독과 잘못된 방향의 인기, '차탈레 부인'으로 재생산되던.. 더보기
멀고도 가까운 그것을 향해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반비, 2016 13쪽,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이야기란, 말하는 행위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이야기는 나침반이고 건축이다. 우리는 이야기로 길을 찾고, 성전과 감옥을 지어 올린다. 이야기 없이 지내는 건 북극의 툰드라나 얼음뿐인 바다처럼 사방으로 펼쳐진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는 당신이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 혹은 그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하나의 장소가 곧 하나의 이야기이며, 이야기는 지형을 이루고, 감정이입은 그 안에서 상상하는 행위이다. 감정이입은 이야기꾼의 재능이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는 방법이다. 심장마비로 말을 잃.. 더보기
2017년 독서목록 독서를 권수로 헤아리는 일이 헛되다는 생각에 한 해 건너뛰었다.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을 읽다 이런 문장을 마주하고 생각이 바뀌었다. -57쪽, 안다는 것은 복잡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때, 다시 말하자면 시적인 틀에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을 다 읽었다고 넘겨버리지 말고, 한줄평 쓰기를 통해 책을 진정으로 읽는 행위로 다가가기로 했다. 1.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류시화 여행기라기보다 하나의 재미난 이야기로 읽기(**) 2.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그래도 나는 쿤데라의 두툼한 소설이 좋아(***) 3. 태연한 인생, 은희경 그녀의 태연한 독백에 홀려(***1/2) 4. 오리엔트 특급열차 살인, 에거서 크리스티 영화 를 보고 급 땡긴 추리소설의 고전(***).. 더보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황석영.이재의.전용호 기록,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창비 우리는 왜 역사를 배우는가. 7차 교육과정으로 '국사'와 '근현대사'를 수능 선택과목으로 골라 공부하며 조선시대 백성들의 수난이나 일제시대의 고통, 피와 어둠으로 얼룩진 현대사의 사건들과 마주할 때마다 생각했다. 특히 1980년 5월 광주의 이야기는 차라리 이 모든 게 픽션이기를 바랄 정도로 정면으로 대하기 고통스러웠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면 거기서 빠져나올 때까지 빨리감기로 넘겨 버린다. 피할 수 없는 오해를 받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결국 베드엔딩으로 끝나는 작품들은 끝까지 보지도 못한다. 고2 근현대사 수업 시간에 역사 선생님께서 흑백으로 된 광주의 영상과 사진을 보여주며.. 더보기
2015년 독서연대기 1-2. 한밤의 아이들, 살만 루슈디 3. 2015년 현대문학상 수상작품집, 편혜영 외 4. 소설가의 일, 김연수(2) 5.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로버트 피어시그 6. 토우의 집, 권여선 7. 작가란 무엇인가_3, 파리 리뷰 인터뷰 8. 나 아닌 다른 삶, 엠마뉘엘 카레르 9. 작가란 무엇인가_2, 파리 리뷰 인터뷰 10. 기적의 세기, 캐런 톰슨 워커 11. 헬스의 정석, 수피 12. 채식주의자, 한강 13.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알프레드 되블린 14.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2) 15-16. 한 여인의 초상, 헨리 제임스 17. 2015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숨 외 18.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시집 19. 조지프 앤턴, 살만 루슈디 20.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더보기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위하여 [한밤의 아이들] 살만 루슈디, 1981, 문학동네(2013) 나는 봄베이 시에서 태어났는데....옛날옛날 한 옛날이었다. 아니, 안 되겠다, 연월일을 생략할 수는 없다. 나는 1947년 8월 15일 나를리카르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시간은? 시간도 중요하다. 그래, 좋다. 밤이었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실은 밤 12시 정각이었다. 내가 나오는 순간, 마치 경의를 표하듯이 시곗바늘들이 하나로 포개졌다. 아, 더 자세히, 더 자세히:나는 인도가 독립하는 바로 그 순간 이 세상으로 굴러 나왔다. (...중략...) 왜냐하면 덤덤하게 나를 맞이했던 그 시계들의 어떤 신비로운 횡포 때문에 나는 불가사의하게 역사에 손목이 묶여버렸고 나의 운명은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이어져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기.. 더보기
은밀한 생, 파스칼 키냐르 57쪽, 이따금 한 동작 속에, 우리의 취향 속에, 우리 목소리의 음향 속에 깊이 박힌 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의 무의식적인 여러 종류의 잔해들이 남아 있다. 그것들은 바닷물이 빠질 때 썰물이 바다로 끌어갈 수 없었던 녹색 게의 작인 발들이나 조가비들의 파편이다. 80쪽, 우리는 묵상에 잠기지 못하고, 서로의 품안으로 달려들게 만드는 사랑 속으로-말없는, 마법에 걸린, 향내 나는, 가식 없는, 아연하게 만드는, 우리의 포옹들이 반쯤 열어놓은, 직접적인 의사 소통 속으로-잠겨들어가지 못하고, 너무나도 많은 말을 했을 뿐이다. 흐트러진 침대 위에서 벗은 몸으로 웅크린 채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어둠 속에서, 겨울이 끝나갈 무렵 난로의 붉은빛에 잠겨, 우리 자신에 관한 끝없는 말들이 우리를 고독으로 밀어넣.. 더보기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간질간질하지만 아름다운 제목에 혹해 책을 편다. 세 장으로 나눠진 책에서 첫 장 '비상의 죄' 첫 문장에서 우리는 당황한다.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 사람들이 그 순간을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세상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읽어갈수록 당황은 커져만 간다.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 그것은 '기구'와 '사진', 세계 최초로 항공 사진을 찍은 펠릭스 투르나숑, 간단한 이름 나다르였다. 기구를 타고 상승하길 열망한 미치광이들의 짧은 역사가 지나가고 이야기는 하늘에서 평지로 하강한다. '평지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인간이고, 인간은 사랑을 한다. 이제껏 함께한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을 함께하게 해보라. 때로는 세상이 .. 더보기
헤로도토스의 [역사]중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들 1권 32장 "크로이소스 전하, 전하께서는 제게 인간사에 관해 물으시지만, 저는 신께서 매우 시기심이 많으시고 변덕스러우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나이다. 인간은 오래 살다 보면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많이 보고, 겪고 싶지 않은 것도 많이 겪어야 하나이다. 저는 인간의 수명을 이른 살로 잡는데, 70년은 윤달을 빼고도 25200일이나 되옵니다. 계절이 역월과 일치하도록 거기에 한 해 걸러 한 번씩 한 달을 덧붙이면, 70년에 35개 윤달이 추가되는데, 이 윤달들은 1050일이 될 것이옵니다. 그러면 70년은 모두 26250일이 되는데, 그중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날은 단 하루도 없사옵니다. 따라서 크로이소스 전하, 인간이란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옵니다.(후략)" 119장, 하르파고스의 아들을 요리하여 먹게 .. 더보기
2014년 독서목록 1. 여름 거짓말(2013), 베른하르트 슐링크2. 등대로(2013/열린책들), 버지니아 울프3. 세월(2012/비채), 마이클 커닝햄4. 한국작가가 읽은 세계문학(2014), 문학동네5. 여름의 맛(2013), 하성란6-7. 괴테와의 대화(2008/민음사), 요한 페터 에커만8. 디어 라이프(2013), 앨리스 먼로9. 작가란 무엇인가(2014), 파리 리뷰 인터뷰110. 생명연습(2014/문학동네), 김승옥11.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2013), 푸른역사아카데미12. 한글의 탄생-문자라는 기적(2011), 노마 히데키13. 불멸(2010/민음사), 밀란 쿤데라14. 201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편혜영 외15. 체 게바라 만세(2014), 박정대 시집16.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2013), 에.. 더보기
사랑은 여름, 사랑은 거짓말 사랑을 비유하는 말은 봄날 떠다니는 꽃씨만큼이나 무한하다. 이 소설집에 기대어 정의해 보자면, 사랑은 여름이다. 여름 공기 터질것만 같은 생명력, 생명이 뿜어내는 열기, 사랑은 여름의 온도와 같다. 답답하다. 숨 쉬기 힘들다. 하지만 여름이 싫다고 여름을 건너뛸 수 없다. 우리는 외친다. 여름이 좋아! 거짓말이다. 여름을 견디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는 거짓말을 한다. 부자 여자친구를 만난 리처드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관계를 지키기 위한 거짓말은 끝내 '그녀를 이미 잃'(108p)게 한다. 은 읽는 내내 한숨이 나왔다. 자신의 이상적인 사랑, 그 사랑이 이룩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는 남자가 소름끼치면서 애처롭고 잔인하고 무섭고 또 이해가 되.. 더보기
2013년 독서연대기 1. [삶과 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2-5. [레 미제라블] 2-5권 빅토르 위고(민음사)6. [소설의 기교] 데이비드 로지7. [웃는 동안] 윤성희(2)8. [이상문학상 작품집-김애란]9.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10.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 시집11. [우주 만화] 이탈로 칼비노(열린책들)12. [개념어 사전] 남경태13. [모든 가능성의 거리] 박정대 시집14. [풍경과 상처] 김훈15. [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정여울16. [마음의 서재] 정여울17. [백百의 그림자] 황정은(2)18.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문학동네)19. [독학자] 배수아20. [열세 걸음] 모옌21. [몰락의 에티카] 신형철(2)22. [How to read 라캉] 슬라보예 지.. 더보기
2012년 독서연대기 1. 미즈타니 오사무 [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 흔한 내용이지만 밤의 선생 미즈타니의 행적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2. 하임 G. 기너트 [교사와 학생사이] 교사가 지닌 최고의 무기는 폭력에 대한 차원 높은 혐오, 처벌에 대한 문명화된 불신이다. 그렇다면 결국 누가 진정한 훈육자인가? 아이들의 마음을 폭력에서 믿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훈육자이다. 3. 헤르만 헤세 [독서의 기술] 책은 오직 삶으로 이끌어주고 삶에 이바지하고 소용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10쪽) 지금까지의 내 잘못된 독서습관에 대한 반성을 이끌어낸 책이 되었고, 헤르만 헤세는 이때부터 나의 스승이 되었다. 4.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펭귄클래식) 번역으로 읽는데도 느껴지는 시인의 아름다운 문.. 더보기
카를 융의 기억 꿈 사상 138쪽, '신의 세계'라는 표현이 어떤 사람에게는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든 '초인간적'인 것들, 눈부신 빛, 심연의 어두움, 시공의 무한성이 지닌 차가운 무감정, 비합리적인 우연세계의 으스스한 괴기성 등이 '신의 세계'에 속했다. '신'은 나에게는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175쪽,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하는 극장 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 더보기
고독과 고통의 서사-그것은 태연한 인생 16쪽, 사랑에 빠진 여인은 생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빛날 것이다. 류의 아버지가 포착하고 전율한 것은 그 아름다움이었다. 그 아름다움은 대개 이미지로 구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서정적 이야기들은 연인의 포옹이나 결혼식으로 끝이 나고그런 것을 해피엔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이후 벌어지는 생활과 이데올로기라는 서사의 세계는 이미지의 세계와 인과관계가 없는 다른 영역이다. 이미지는 순간적으로 쏘이는 광선 같은 것이고 자체로 완결되기 때문에 진위 같은 건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의심하지도 상처받지도 않았다. 빚 같은 것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서사의 영역에 속한 어머니의 삶을 이끄는 것은 이미지가 아닌 패턴이었고 그것은 뜨개질 본처럼 이어져가야만 했기 때문에 절단면의 상처는 깊었다. 그것은 비용.. 더보기
유령이지만 우리의 냄새가 나요 파씨의 입문 - 황정은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유령들의 이야기 진짜 유령이 나오는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를 다섯 번 죽고 다섯 번 살아나 여섯 번째 죽음을 맞는 가난이라는 폭력에 맞서 서서히 희미해지는 너덜너덜해진 생존권 그리고 유령을 닮은 옹기에 매료된 소년의 이 유령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을 하고 들은 적 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운다. 그런데 냄새만큼은 우리와 같은 냄새,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 세계의 냄새, 잔인하고 지독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의 냄새가 난다. 유령을 말하나 세상을 보여주는 그녀의 소설에 매료된다. 수천명 중에 몇백명 만이 웃는 빌어먹을 시험을 준비하는 나머지 울게 될 사람들은 어떻게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를 유령이 될지도 모를 그런 시험을 한 달 앞둔 내가 그녀에게 매료된다. 더보기
피비린내나는 빨간 사과 영이 02 - 김사과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24쪽, 아빠가 술을 마시면 엄마는 욕을 하고 아빠는 엄마를 때리고 둘은 싸운다. 한 문장으로 쓰면 될 것을 나는 왜 이렇게 많은 문장을 쓰고 있나. 왜냐하면 백 문장에는 백 문장의 진실이 있고 한 문장에는 한 문장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열 시간의 고통과 십분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백 문장의 진실과 한 문장의 진실은 다르다. 이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광경이기 때문에, 한 문장-삼초의 고통이 아니라 천 문장-삼천 초의 고통을 안겨줘야 한다. 그래야만 당신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읽는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아주 오래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당신은 아주 오래 느껴야 한다. 한번 더 사는.. 더보기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김연수 지음/자음과모음 김연수의 소설을 좋아한다. 특유의 사색적 문장을 좋아한다. 좋아서 친구들에게 추천하면, '잘 모르겠다'는 애매한 답을 돌려준다. 몇 번 돌려받은 답신 끝에 그의 소설을 추천하는 건 그만두었다. 그러나 이번 소설만큼은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다. 이번 작품은 그만의 사색이 서사와 균형을 제대로 이룬다. 자신의 근원-부모 찾기라는 보편적인 문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이야기가 술술 잘 읽혔다. 어머니 찾기는 아버지 찾기로, 주인공 카밀라 포트만의 탄생에 얽힌 진실 탐구로 서사의 강은 거침없이 흘러간다. 그렇다면 카밀라는 왜, 이전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그랬듯이 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가? 100쪽, 거기까지 말하고 신혜숙은 전화를 끊었다. 그녀에게.. 더보기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동녘 솔직히 고백한다.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알라딘 노트 사은품이 탐나서였다고. 다소 불순한 이 구입동기는 나에게 뜻밖의 지적 자극을 안겨주었다. 25년생의 폴란드 노학자는 87년생 한국인 꼬꼬마에게 이 시대를 보는 관점을 제시해주었다. 새 안경을 맞추듯.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로, 이정표는 커녕 당장 걷고 있는 길 자체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버리는 변화의 세계. 울렁거리는 유동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메슥거리는 멀미를 가라앉히기 위해 sns중독에 빠지거나, 종교에 매달리거나, 미친듯이 쇼핑을 한다. 어디로 가야 하나 길조차 알 수 없는 세계, 막연한 공포에 대한 공포(포보포비아)에 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