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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피부 아래 숨겨진 것은 나는 종종 공포영화, 그중에서도 고어 물을 즐겨 본다. 목과 팔다리가 잘리고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볼 때마다 나는 신기하다. 익숙한 우리의 피부를 단 한 겹만 벗기면 드러나는 낯선 풍경, 혈관과 근육과 뼈들, 내장들, 그것은 나인데 내가 아니다. 내 아래 존재하는 세계지만 우리는 그 세계와 마주한 순간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다. 힐러리 맨틀의 단편집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이것이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여기는 이 세계란 얼마나 위태로운가, 피부와도 같은 연약한 껍질에 간신히 유지되고 있을 뿐인데. 읽으면서 가장 소름이 돋았던 단편 와 의 태연하고도 잔인한 문장들, 65쪽, 메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운명, 그러니까 두들겨 맞고, 몸이 뒤틀리고, 가죽이 벗겨지는 운명들을 지루하게 곱씹었.. 더보기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단순한 에로티시즘 소설인가? 채털리 부인의 연인 1 - D.H. 로렌스 지음, 이인규 옮김/민음사 -2권235쪽, 세상이 결코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 딱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섹스를 솔직하고 깨끗이 드러내는 행위이지요. 더럽게 감추며 욕하는 것은 얼마든지 해도 괜찮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섹스를 더럽히고 욕할수록 그만큼 더 섹스를 좋아하지요. 하지만 만약 당신이 자신의 섹스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믿고 그것을 더럽히려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여지없이 당신을 거꾸러뜨리고 말 겁니다. 그건 정신 나간 금기 사항 중 아직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지요. 즉, 절대 섹스를 자연스럽고 생명의 원천이 되는 행위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이 달고 다닌 각종 오해와 오역, 오독과 잘못된 방향의 인기, '차탈레 부인'으로 재생산되던.. 더보기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위하여 [한밤의 아이들] 살만 루슈디, 1981, 문학동네(2013) 나는 봄베이 시에서 태어났는데....옛날옛날 한 옛날이었다. 아니, 안 되겠다, 연월일을 생략할 수는 없다. 나는 1947년 8월 15일 나를리카르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시간은? 시간도 중요하다. 그래, 좋다. 밤이었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실은 밤 12시 정각이었다. 내가 나오는 순간, 마치 경의를 표하듯이 시곗바늘들이 하나로 포개졌다. 아, 더 자세히, 더 자세히:나는 인도가 독립하는 바로 그 순간 이 세상으로 굴러 나왔다. (...중략...) 왜냐하면 덤덤하게 나를 맞이했던 그 시계들의 어떤 신비로운 횡포 때문에 나는 불가사의하게 역사에 손목이 묶여버렸고 나의 운명은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이어져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기.. 더보기
은밀한 생, 파스칼 키냐르 57쪽, 이따금 한 동작 속에, 우리의 취향 속에, 우리 목소리의 음향 속에 깊이 박힌 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의 무의식적인 여러 종류의 잔해들이 남아 있다. 그것들은 바닷물이 빠질 때 썰물이 바다로 끌어갈 수 없었던 녹색 게의 작인 발들이나 조가비들의 파편이다. 80쪽, 우리는 묵상에 잠기지 못하고, 서로의 품안으로 달려들게 만드는 사랑 속으로-말없는, 마법에 걸린, 향내 나는, 가식 없는, 아연하게 만드는, 우리의 포옹들이 반쯤 열어놓은, 직접적인 의사 소통 속으로-잠겨들어가지 못하고, 너무나도 많은 말을 했을 뿐이다. 흐트러진 침대 위에서 벗은 몸으로 웅크린 채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어둠 속에서, 겨울이 끝나갈 무렵 난로의 붉은빛에 잠겨, 우리 자신에 관한 끝없는 말들이 우리를 고독으로 밀어넣.. 더보기
사랑은 여름, 사랑은 거짓말 사랑을 비유하는 말은 봄날 떠다니는 꽃씨만큼이나 무한하다. 이 소설집에 기대어 정의해 보자면, 사랑은 여름이다. 여름 공기 터질것만 같은 생명력, 생명이 뿜어내는 열기, 사랑은 여름의 온도와 같다. 답답하다. 숨 쉬기 힘들다. 하지만 여름이 싫다고 여름을 건너뛸 수 없다. 우리는 외친다. 여름이 좋아! 거짓말이다. 여름을 견디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는 거짓말을 한다. 부자 여자친구를 만난 리처드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관계를 지키기 위한 거짓말은 끝내 '그녀를 이미 잃'(108p)게 한다. 은 읽는 내내 한숨이 나왔다. 자신의 이상적인 사랑, 그 사랑이 이룩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는 남자가 소름끼치면서 애처롭고 잔인하고 무섭고 또 이해가 되.. 더보기
고독과 고통의 서사-그것은 태연한 인생 16쪽, 사랑에 빠진 여인은 생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빛날 것이다. 류의 아버지가 포착하고 전율한 것은 그 아름다움이었다. 그 아름다움은 대개 이미지로 구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서정적 이야기들은 연인의 포옹이나 결혼식으로 끝이 나고그런 것을 해피엔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이후 벌어지는 생활과 이데올로기라는 서사의 세계는 이미지의 세계와 인과관계가 없는 다른 영역이다. 이미지는 순간적으로 쏘이는 광선 같은 것이고 자체로 완결되기 때문에 진위 같은 건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의심하지도 상처받지도 않았다. 빚 같은 것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서사의 영역에 속한 어머니의 삶을 이끄는 것은 이미지가 아닌 패턴이었고 그것은 뜨개질 본처럼 이어져가야만 했기 때문에 절단면의 상처는 깊었다. 그것은 비용.. 더보기
유령이지만 우리의 냄새가 나요 파씨의 입문 - 황정은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유령들의 이야기 진짜 유령이 나오는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를 다섯 번 죽고 다섯 번 살아나 여섯 번째 죽음을 맞는 가난이라는 폭력에 맞서 서서히 희미해지는 너덜너덜해진 생존권 그리고 유령을 닮은 옹기에 매료된 소년의 이 유령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을 하고 들은 적 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운다. 그런데 냄새만큼은 우리와 같은 냄새,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 세계의 냄새, 잔인하고 지독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의 냄새가 난다. 유령을 말하나 세상을 보여주는 그녀의 소설에 매료된다. 수천명 중에 몇백명 만이 웃는 빌어먹을 시험을 준비하는 나머지 울게 될 사람들은 어떻게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를 유령이 될지도 모를 그런 시험을 한 달 앞둔 내가 그녀에게 매료된다. 더보기
피비린내나는 빨간 사과 영이 02 - 김사과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24쪽, 아빠가 술을 마시면 엄마는 욕을 하고 아빠는 엄마를 때리고 둘은 싸운다. 한 문장으로 쓰면 될 것을 나는 왜 이렇게 많은 문장을 쓰고 있나. 왜냐하면 백 문장에는 백 문장의 진실이 있고 한 문장에는 한 문장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열 시간의 고통과 십분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백 문장의 진실과 한 문장의 진실은 다르다. 이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광경이기 때문에, 한 문장-삼초의 고통이 아니라 천 문장-삼천 초의 고통을 안겨줘야 한다. 그래야만 당신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읽는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아주 오래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당신은 아주 오래 느껴야 한다. 한번 더 사는.. 더보기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김연수 지음/자음과모음 김연수의 소설을 좋아한다. 특유의 사색적 문장을 좋아한다. 좋아서 친구들에게 추천하면, '잘 모르겠다'는 애매한 답을 돌려준다. 몇 번 돌려받은 답신 끝에 그의 소설을 추천하는 건 그만두었다. 그러나 이번 소설만큼은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다. 이번 작품은 그만의 사색이 서사와 균형을 제대로 이룬다. 자신의 근원-부모 찾기라는 보편적인 문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이야기가 술술 잘 읽혔다. 어머니 찾기는 아버지 찾기로, 주인공 카밀라 포트만의 탄생에 얽힌 진실 탐구로 서사의 강은 거침없이 흘러간다. 그렇다면 카밀라는 왜, 이전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그랬듯이 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가? 100쪽, 거기까지 말하고 신혜숙은 전화를 끊었다. 그녀에게.. 더보기
비행운과 비행운 293쪽,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 더보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2쪽,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 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 더보기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 소립자 -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열린책들 25쪽, 어떤 물고기가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이따금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다고 할 때, 그 물고기는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몇 초 동안 무엇을 보게 될까? 수중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공기의 세계, 천국 같은 세계를 보게 되지 않을까? 물론 그러고 나면 물고기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해초의 정글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물고기는 다른 세계, 어떤 완전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감하지 않았을까? 제목에서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한 소설이면서도, 예상한 그 이상의 지평선을 보여 주는 소설.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적 설명과 20세기 말 서구사회의 성 풍속도가 뒤얽히면서 진행되는 소설은 SF적인 결말로 끝맺는다. (.. 더보기
우엘벡의 백과사전적 서술에 대하여 드디어 유명하다면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벡의 작품을 한 권 읽는 데 성공했다. 공쿠르 상 수상작 [지도와 영토]로 시작점을 찍으니 산뜻하고 예술적이다. 우엘벡을 화제의 작가로 만든 특유의 주제의식과 백과사전적 지식의 짜깁기 방식에도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주인공이 벤츠를 타고 가면서 벤츠에 대한 지식과 소비 방식을 나열하는 서술방식은 확실히 특이하다.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를 보여주는 방식의 하나로써 '콜라주' 형식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겠다. 이런 서술방식이 뜻밖의 유머로 터져나온 장면이, 주인공 제드 마르탱이 초상화 작업을 위해 미셸 우엘벡을 찍으러 삼성 카메라를 사서 그 설명서를 읽는 부분이다. 194쪽, 2010년대의 소비자가 좋아라 할 만한 가장 좋은 방법은 한국 제품을 선택.. 더보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명한 걸작, 죄와 벌 2003년도에 나온 새빨간 열린책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초기 판본 [죄와 벌]은, 아마 내 기억에 고 1때 독서경시대회 대상 도서라 산 것이었다. 길고 긴 러시아식 이름에 뭔 부칭에, 본명에, 애칭까지 복잡한 호칭 체계에 스토리를 따라잡기도 전에 지쳐버려 50쪽 정도를 겨우 읽고는 미련없이 포기한 추억은 덤이다. 하긴 그때 억지로 다 읽었다고 해도 열일곱의 나는 책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겠지. 이번의 완독은 읽을 준비가 다 된 뒤였기에 끝마칠 수 있었던 것. 이 유명한 고전 [죄와 벌]을 '한 가난한 대학생이 대학 등록금 때문에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자수하는 이야기'라고 일단 한 줄로 줄여보자. 현재 신문에 실려도 어색하지 않은 화젯거리다. 이런 흔하디 흔한 소재를 가져다 거장은 인간의 도덕과 윤리, 종.. 더보기
다른 세계에서 은어낚시통신이 도착했다 은어낚시통신 - 윤대녕 지음/문학동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기나긴 연도를 가득 메우고 지나가는 장례 행렬을 목격했다. 그때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진, 그 애는 돌아오지 않는다! 터덜거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묵은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대전을 떠나올 때 가판대에서 사서 읽지도 않고 여행가방에 쑤셔넣었던 것이었다. 거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최근에 한국을 다녀간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강연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한 글이었다. 이날 오후 호킹 교수의 우주 강연회가 열린 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룸은 시작 삼십 분 전부터 초만원을 이루었다. 강연은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는 호킹 교수의 언어합성기 소리에 청중이 "예"하고 크게 답하면서 시작됐다.. 더보기
읽고 또 읽는 제인 에어 제인 에어 1 -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민음사 BBC에서 제작한 드라마 4부작을 보고 활활 불타올라 그만 2권짜리 원작도 단숨에 읽어버렸다. 읽어도 읽어도 재미있는 제인 에어의 힘은 15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118쪽,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이란 없을 텐데! 맑게 비치는 달의 표면에도 검은 티는 있는 법인데 스캐처드 선생과 같은 사람의 눈에는 사소한 결점만 뜨일 뿐 천체에 넘쳐흐르는 찬란한 빛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197쪽, 나를 탓하는 사람이 있을까? 틀림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분수에 맞지 않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안정을 갖지 못하는 것은 나의 타고난 성품이었고 그것이 어떤 때는 고통이 될.. 더보기
웃는 동안 89쪽, "호치키스." 민기가 중얼거렸다. "뭐야?" 영재와 성민이 물었다. "나는 이상하게 호치키스라고 말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 왜 그럴까?" 민기가 다시 호치키스, 하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자 영재가 누구나 자기만의 주문이 있는 법이야, 하며 민기의 어깨를 두드렸다. "껌으로 막힌 열쇠 구멍. 그게 내 주문이야." 성민이 말했다. (나는 눈을 감고 통조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어느 공장의 풍경을 그려보았다.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나는 수십만 개의 통조림을 만드는 공장의 기계를 상상해보곤 했다. 그러면 금방 배가 고파졌다.) 윤성희의 소설은 사소하다. 버려진 선풍기를 보며 갑자기 눈물을 보이는 여자가 소설의 주인공이 된다(부메랑). 윤성희의 소설은 따뜻하다. 버스도 안 타면서 버스정류장에 .. 더보기
사랑하려는 말테의 수기 그랬다. 나는 이 책을 읽어보려고 한번 시도한 때가 있었다.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는 기억이 불명확하다. 제목에서 풍기는 '문학소녀스러운 느낌'에 끌려 책을 집어들고는 딱 한페이지 읽고 즉시 반납했다. 아직은 이 책을 읽을 때가 아니었다. 시간은 흘러 이 책을 읽어도 되는 시기가 다가왔다. 누구나 이름은 들어봤을법한 시인 릴케의 소설은 나와 책의 약속시간이 적절했는지 유려하게 잘 읽혔다. 시인다운 문장들에 감탄하기도 했다(17쪽, 길게 이어진 화단의 꽃들은 저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며 깜짝 놀라는 목소리로 '빨강'하고 말했다.). 고독한 파리의 초상에 쓸쓸해지기도 했다. 사물의 내면까지 '보려고'노력하는 시인의 태도에 진지해져 보기도 했다. 다른 이들에게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지만, 내게는 아름다운 .. 더보기
생의 한가운데 p21 때때로 나는 아직도 인기척이 없고 모든 것이 회색인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깹니다. 그러면 나는 공포를, 목을 죄는 공포를 느낍니다. 그럴 때면 어떤 위대한 것에 대한 상념도, 신에 대한 생각까지도 나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 공포와 완전히 혼자인 것입니다. 공포와 가장 무서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해봅니다. 그러면 나는 여러 개의 대답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내가 이 생에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리라는, 아무것도 훌륭한 것을 이룰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내 생명을 그저 아무렇게나 흘려보내고 참으로 살지 않았으리라는 공포입니다. 또는 내가 어떤 과오를 범하고 그 과오가 나의 발전을 좁은 범위 내에서 움직이도록 판결지워 버리리라는 공포입니다. .. 더보기
윤고은의 1인용 식탁 p25 어릴 때는 홀수가 싫었다. 무리를 굳이 둘씩 나누는 상황이 종종 일어났기 때문이다. 운동장에서, 수학여행 가는 버스에서, 놀이기구에서, 관계는 '둘'로 정의되었고, 전체가 홀수였다면 한명은 꼭 남았다. 3-2=1, 5-2-2=1, 7-2-2-2=1, 이런 계산법으로 인해 외톨이가 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정원이 48명인 반에서 나는 마음이 편안했고, 47명인 반에서 마음이 불안했다. 48명인 반에서 일어나는 전학이나 결석, 조퇴와 같은 일들도 역시 불안했다. 어릴 때 운동장이나 교실 안에서 겪었던 홀로됨의 어색함은 결국 교문 안에서만 유효할 뿐, 그 당시에는 중요했던 그 문제가 사실 미니어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정말 비극이 시작된다. 교문 밖에서 울타리도 없이 벌어지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