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후에 동물원을 찾는 사람들이란 뭔가 이 세상 아닌 다른 세상을 보고 싶은 욕망에 찌든 족속들일 테다 동물원 초입에서 만난 기린은 이곳이 가짜의 세상일 거라는 확신을 갖게 만든다 기린은 공기 속에 감춰진 물감들이 스스로 몸을 풀어 새겨놓은 허공의 환영과도 같다 인간의 키보다 서너 배 높은 허공에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저 커다란 짐승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면 기린은 실제보다 더 커 보인다 액정에 뜬 기린의 모습을 기묘하다는 듯 바라보는 이 사람은 사실 기린의 눈으로 보건대, 긴 얼룩무늬 혀로 한번 스윽 핥으면 사라질 우주의 얼룩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기린은 그 맛을 짜게도 달게도 느끼지 않는다 그저 날숨 다음에 그 큰 콧구멍으로 빠져나간 달짝지근한 공기의 파동만큼만 스스로의 움직임을 자각할 뿐이다
기린을 시야에 넣는 순간 그렇게 한 세계가 지워지고 내가 지워지고 기린마저 지워진다 기린은 그러나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하나의 기다란 생물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기린은 그것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집단적 홀로그램과도 같다 가난한 인간들을 위한 집 몇 채를 분양해도 좋을 만큼 널따낳게 가공된 초원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움직이는 듯 가만히 있는 기린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 무언가에 대한 열망을 토로하는 또다른 세계를 떠올린다 사람들은 결국 기린을 보고 싶어하는 불가능한 열망을 위해 실제로 몸을 움직이고 소리를 드높이는 게 아닌가 그러나 기린은 우리가 그를 보는 순간 커다란 몸을 드러내지만 눈앞에 나타난 기린은 기린이 없다는 참기 어려운 진리만 알려준다 그럼에도 기린은 계속 움직인다 입을 오물거리고 이쪽을 멀뚱거리다가 갑자기 화가 난듯 성큼성큼 기중기처럼 움직여 세계의 차원을 뒤바꾼다 기린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이미 세상 밖이거나 세상의 더 깊은 속이다
기린에게서 등을 돌리는 순간, 여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윽한 울음소리가 대기에 가득 찬다 먹구름이 몰려온다 그러고 보니 기린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이 사람은 조만간 물결에 쓸려나갈 흐릿한 그림 같은 걸 떠올렸던 것 같다 기린의 울음을 들으려면 이토록 오랜 시간과 굵직한 상념의 동굴을 지나와야 하는 것이다 사람 하나의 몸을 통째로 삼키고도 여백이 남을 긴 목은 도대체 몇 광년의 어둠을 머금고 있는 것일까 기린이 완전히 사라지자 비가 내린다 이 사람의 평범함은 기린의 위대한 침묵 앞에서 서서히 목을 조아린다 이 비는 과연 어떤 알지 못할 짐승의 타액이길래 이토록 정겹게 허망한가 정작 동물원이 가두고 있는 게 사람이란 걸 안다면 평일엔 되도록 피하라고 일러두고 싶다 기린과 함께 사라진 게 알고 보면 당신 자신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그저 크게 웃고 말 배짱이 없으시다면 말이다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