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코알라 썸네일형 리스트형 위험한 가계, 기형도 1.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풍병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 2.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더보기 아마도 아프리카 시와 그리 친하지만은 않은 내가 시집 한 권을 온전히, 집중해서, 가슴 떨려하며, 애지중지 읽는 일은 흔치 않다. 이제니의 [아마도 아프리카]가 그런 희귀한 시집 중 하나다. 김연수의 산문집에서 알게 된 그녀의 시는 뭐랄까, 새로운 세계로 가는 입구를 간단한 언어로 열어젖히는 마법소녀 같다고 해야 할까. 진부한 묘사지만 내게 그녀의 시는 마법 같았다.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요롱이는 말한다.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요롱요롱한 어투로 요롱요롱하게.(요롱이는 말한다)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박였다. .. 더보기 인중을 긁적거리며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배 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 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 보니, 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 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 더보기 독 만드는 공장의 공원들은 내 좌심방과 우심실 사이, 독 만드는 공장의 공원들 모두에게는 음독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조도 받았다 독이 어디로 팔려나가는지 수출되는지 내수용인지 공원들은 알지 못한다 아주 늦은 밤 검은 개가 짖고 큰 차가 오고 셔터소리 두 번 들리면 독이 든 상자는 밤이 조금만 더 잠잠해지길 기다린다 공장에는 실험용 흰쥐 수백 마리가 살기도 한다 실험으로 죽은 쥐들의 혀에서 주사기로 감정을 빼내 만들어진 독은 개별 포장되기도 한다 공원들의 하루 목표량은 독 30밀리그램으로 하루 아홉 시간 동안 어둔 창살 안에서 만들어지는 양이라 한다 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독은 독으로서가 아니라 식용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공원들도 대표도 모른다 하지만 눈이 사시인 생산직 소년의 귀띔에 .. 더보기 기린은 환영이다 평일 오후에 동물원을 찾는 사람들이란 뭔가 이 세상 아닌 다른 세상을 보고 싶은 욕망에 찌든 족속들일 테다 동물원 초입에서 만난 기린은 이곳이 가짜의 세상일 거라는 확신을 갖게 만든다 기린은 공기 속에 감춰진 물감들이 스스로 몸을 풀어 새겨놓은 허공의 환영과도 같다 인간의 키보다 서너 배 높은 허공에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저 커다란 짐승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면 기린은 실제보다 더 커 보인다 액정에 뜬 기린의 모습을 기묘하다는 듯 바라보는 이 사람은 사실 기린의 눈으로 보건대, 긴 얼룩무늬 혀로 한번 스윽 핥으면 사라질 우주의 얼룩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기린은 그 맛을 짜게도 달게도 느끼지 않는다 그저 날숨 다음에 그 큰 콧구멍으로 빠져나간 달짝지근한 공기의 파동만큼만 스스로의 움직임을 자각할 뿐이다 기린을.. 더보기 고스트 월드 겨울밤차고 미끄러운 불빛과차고 울퉁불퉁한 시간을짝짝이로 신고 다리를 건너쇼핑몰에 간다 쫄깃쫄깃한 고단백 눈알 통조림을 두 캔 산다 캔을 안고 있다보면 어느 별에 몸이 닿기도 한다 눈알은 들소나 야생 고양이나 송골매의 것이라는 설이 분분하나 화성에서 온 짐승의 것이라는 풍문도 있다 먹게 되면 한시도 몸이 어두워지지 않는 붉은색의 눈알을 나는 특히 좋아한다 나비 2천 마리의 날개로 만든 분말을 한 병 산다 나는 서른다섯번째 이 병을 산다 한 숟가락을 물 없이 삼키면 동남쪽에 폭우가 쏟아진다 다시 거기서부터 20리 떨어진 곳의 하늘에 해가 여럿 생겨난다 다시 거기서부터 50리 떨어진 곳에서 곡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그 곡소리를 일 년 내내 듣게 되면 썩지 않는 발이나 심장을 갖게 된다 사과처럼 머리꼭지를 사각사.. 더보기 멜랑콜리호두파이 배가 고파서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꿈속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나 하나 때문에무지개 언덕을 찾아가는 여행이 어색해졌다 나비야 나비야 누군가 창밖에서 나비를 애타게 부른다나는 야옹 야아옹, 여기 있다고, 이불 속에 숨어나도 모르게 울었다그러는 내가 금세 한심해져서 나비는 나비지 나비가 무슨 고양이람, 괜한 창문만 소리나게 닫았지 압정에, 작고 녹슨 압정에 찔려 파상풍에 걸리고팔을 절단하게 되면, 기분이 나쁠까 느린 음악에 찌들어 사는 날들머리빗, 단추 한 알, 오래된 엽서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이 괜스레 미워져서뒷마당에 꾹꾹 묻었다 눈 내리고 바람 불면언젠가 그 작은 무덤에서 꼬챙이 같은 원망들이 이리저리 자라내 두 눈알을 후벼주었으면. 해질 녘, 어디든 퍼질러 앉는 저 구름들도 싫어오늘은 달고 맛 좋은..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