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데 내겐 일주일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복잡하고 난해한 스토리는 아니다. 책만 파대던 공부벌레가 어느 날 삶을 '아는'게 아니라 '살아가는'대지의 인간 조르바를 만나고 변한다는 이야기. 지성과 행동의 만남이라, 대충 줄거리가 어떻게 흘러갈지 읽다 보면 가닥이 잡힌다. 번역도 잘 된 작품이라 소문난 책이라 읽기 불편한 점도 없었다. 상상 외로 화자인 공부벌레 '나'가 꽉 막힌 백면서생이 아니라는 점과, 상상을 훌쩍 넘어서는 조르바란 인물의 거대한 존재감이 의외의 부분이었다. 그리고 여자로서 책 속의 보수적인 여성관이 좀 거슬렸다는 것 정도? 를 고려하며 읽다 보니 책장에서 일주일이 흘러나갔다.
슬프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나는 조르바의 삶의 태도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자유라는 거지요! 그러나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란 버거운 형벌과도 같다.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예리하게 성찰한 바와 같이, 인간은 자유를 견디지 못한다. 조르바가 위대한 건 직접 삶을 살아가며 끝내 인간에게 매여진 질긴 줄을 끊어버린, 희귀한 인간형이기 때문이다. 식욕 등의 기초적인 욕망에서부터 명예욕이나 금전욕, 가족과 사회와 국가라는 집단에 대한 의무 등등, 그 층위는 다를지라도 인간은 이 모든 것들에 매인 존재다.
339p.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만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내가 오기를 부렸다. 조르바의 말이 정통으로 내 상처를 건드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려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잘은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이 잡것이! 줄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이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지.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노란 양국 맛이지. 멀건 양국 차 말이오. 럼주 같은 맛이 아니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화자인 '나'-니코스 카잔차키스 자신-조차도 책, 지식, 붓다, 조국 등등의 줄에 매달려 있지 않은가. '나'와 만났을 때 조르바는 이미 그 줄을 끊고 삶을, 자유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꽃 한 송이에도 그는 감격해하며 봄을 느끼고, 순간순간의 변화에 하느님을 발견하며, 자신의 감정을 언어에 가두지 않고 대지에 두 발을 딛고서 춤으로 춰 보인다. 메토이소노(거룩하게 되기)-카잔차키스가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붓다를 거쳐 탐구한 거룩함의 현현인 조르바.
65p. "두목, 인간이란 짐승이에요."
"안 믿지요. 아무것도 안 믿어요. 몇 번이나 얘기해야 알아듣겠소?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내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
248p. "그럼 조르바, 당신이 책을 써보지 그래요? 세상의 신비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면 그도 좋은 일 아닌가요?" 내가 비꼬았다.
"못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못했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나는 당신의 소위 그 <신비>를 살아 버리느라고 쓸 시간을 못 냈지요. 때로는 전쟁, 때로는 여자, 때로는 술, 때로는 산투리를 살아 버렸어요. 그러니 내게 펜대 운전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러니 이런 일들이 펜대 운전사들에게 떨어진 거지요.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인간을 넘어선 인간의 존재가 읽는 동안 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아무리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그의 사상에 감동해도 난 조르바가 될 수 없으니까. 하다못해 지금 존재하고 있는 내 몸조차도, 내가 좀 더 날씬하고 이상적인 체형이라 상상하는 미래의 몸에게 부정당한다. 아무리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누군가의 무심한 시선 하나에도 난 자유로울 수 없다. 역시 변하기는 했지만 최종적으론 조르바가 될 수 없었던 '나'처럼, 조르바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카잔차키스 처럼, 나도 조르바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는 것만으로 일단은 접어둔다.
259p.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순 없을까? 아주 조금의 자유라도 내게는 버거운 과제일까?
슬프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나는 조르바의 삶의 태도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자유라는 거지요! 그러나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란 버거운 형벌과도 같다.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예리하게 성찰한 바와 같이, 인간은 자유를 견디지 못한다. 조르바가 위대한 건 직접 삶을 살아가며 끝내 인간에게 매여진 질긴 줄을 끊어버린, 희귀한 인간형이기 때문이다. 식욕 등의 기초적인 욕망에서부터 명예욕이나 금전욕, 가족과 사회와 국가라는 집단에 대한 의무 등등, 그 층위는 다를지라도 인간은 이 모든 것들에 매인 존재다.
339p.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만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내가 오기를 부렸다. 조르바의 말이 정통으로 내 상처를 건드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려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잘은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이 잡것이! 줄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이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지.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노란 양국 맛이지. 멀건 양국 차 말이오. 럼주 같은 맛이 아니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화자인 '나'-니코스 카잔차키스 자신-조차도 책, 지식, 붓다, 조국 등등의 줄에 매달려 있지 않은가. '나'와 만났을 때 조르바는 이미 그 줄을 끊고 삶을, 자유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꽃 한 송이에도 그는 감격해하며 봄을 느끼고, 순간순간의 변화에 하느님을 발견하며, 자신의 감정을 언어에 가두지 않고 대지에 두 발을 딛고서 춤으로 춰 보인다. 메토이소노(거룩하게 되기)-카잔차키스가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붓다를 거쳐 탐구한 거룩함의 현현인 조르바.
65p. "두목, 인간이란 짐승이에요."
"안 믿지요. 아무것도 안 믿어요. 몇 번이나 얘기해야 알아듣겠소?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내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
248p. "그럼 조르바, 당신이 책을 써보지 그래요? 세상의 신비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면 그도 좋은 일 아닌가요?" 내가 비꼬았다.
"못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못했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나는 당신의 소위 그 <신비>를 살아 버리느라고 쓸 시간을 못 냈지요. 때로는 전쟁, 때로는 여자, 때로는 술, 때로는 산투리를 살아 버렸어요. 그러니 내게 펜대 운전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러니 이런 일들이 펜대 운전사들에게 떨어진 거지요.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인간을 넘어선 인간의 존재가 읽는 동안 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아무리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그의 사상에 감동해도 난 조르바가 될 수 없으니까. 하다못해 지금 존재하고 있는 내 몸조차도, 내가 좀 더 날씬하고 이상적인 체형이라 상상하는 미래의 몸에게 부정당한다. 아무리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누군가의 무심한 시선 하나에도 난 자유로울 수 없다. 역시 변하기는 했지만 최종적으론 조르바가 될 수 없었던 '나'처럼, 조르바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카잔차키스 처럼, 나도 조르바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는 것만으로 일단은 접어둔다.
259p.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순 없을까? 아주 조금의 자유라도 내게는 버거운 과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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