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 아래 숨겨진 것은
나는 종종 공포영화, 그중에서도 고어 물을 즐겨 본다. 목과 팔다리가 잘리고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볼 때마다 나는 신기하다. 익숙한 우리의 피부를 단 한 겹만 벗기면 드러나는 낯선 풍경, 혈관과 근육과 뼈들, 내장들, 그것은 나인데 내가 아니다. 내 아래 존재하는 세계지만 우리는 그 세계와 마주한 순간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다. 힐러리 맨틀의 단편집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이것이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여기는 이 세계란 얼마나 위태로운가, 피부와도 같은 연약한 껍질에 간신히 유지되고 있을 뿐인데. 읽으면서 가장 소름이 돋았던 단편 와 의 태연하고도 잔인한 문장들, 65쪽, 메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운명, 그러니까 두들겨 맞고, 몸이 뒤틀리고, 가죽이 벗겨지는 운명들을 지루하게 곱씹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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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생, 파스칼 키냐르
57쪽, 이따금 한 동작 속에, 우리의 취향 속에, 우리 목소리의 음향 속에 깊이 박힌 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의 무의식적인 여러 종류의 잔해들이 남아 있다. 그것들은 바닷물이 빠질 때 썰물이 바다로 끌어갈 수 없었던 녹색 게의 작인 발들이나 조가비들의 파편이다. 80쪽, 우리는 묵상에 잠기지 못하고, 서로의 품안으로 달려들게 만드는 사랑 속으로-말없는, 마법에 걸린, 향내 나는, 가식 없는, 아연하게 만드는, 우리의 포옹들이 반쯤 열어놓은, 직접적인 의사 소통 속으로-잠겨들어가지 못하고, 너무나도 많은 말을 했을 뿐이다. 흐트러진 침대 위에서 벗은 몸으로 웅크린 채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어둠 속에서, 겨울이 끝나갈 무렵 난로의 붉은빛에 잠겨, 우리 자신에 관한 끝없는 말들이 우리를 고독으로 밀어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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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의 1인용 식탁
p25 어릴 때는 홀수가 싫었다. 무리를 굳이 둘씩 나누는 상황이 종종 일어났기 때문이다. 운동장에서, 수학여행 가는 버스에서, 놀이기구에서, 관계는 '둘'로 정의되었고, 전체가 홀수였다면 한명은 꼭 남았다. 3-2=1, 5-2-2=1, 7-2-2-2=1, 이런 계산법으로 인해 외톨이가 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정원이 48명인 반에서 나는 마음이 편안했고, 47명인 반에서 마음이 불안했다. 48명인 반에서 일어나는 전학이나 결석, 조퇴와 같은 일들도 역시 불안했다. 어릴 때 운동장이나 교실 안에서 겪었던 홀로됨의 어색함은 결국 교문 안에서만 유효할 뿐, 그 당시에는 중요했던 그 문제가 사실 미니어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정말 비극이 시작된다. 교문 밖에서 울타리도 없이 벌어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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