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바야르의 추리 비평의 흥미진진한 세계 속으로 고고~
p56 텍스트는 작품이 쓰이고 난 이후에, 그것도 글쓰기로부터 한참 멀어져서 독서 중에 개별적인 탄생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보편적 텍스트라는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으리라는 희망 없이 비평 탐구를 위한 새로운 영역으로 제시된다.
p64 문학 작품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그 불완전함이 어떤 것이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문학 작품도 완벽한 세계를 이루고 있지 않다. 문학 작품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서 요소들을 빌려오지만 세계를 통째로 보여주거나 체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개입 없이는 충분하지 않을 단편적인 정보들만 제공한다. 그러므로 이 불충분한 문학 공간을 세계의 조각들이라 말해야 더 맞을 것이다.
그렇기에 독서와 비평 작용이 이 세계를 보완할 수밖에 없다. 데이터가 부족한 곳에 데이터를 보태고, 묘사를 완성하고, 미완의 생각을 잇고, 텍스트에 과거와 미래를 지어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작품은 각 독자를 통해 연장되며, 독자는 작품 세계에 살면서 자신을 위해 임시로 작품을 완성한다. 이 개별적 종결은 작품의 모든 차원과 연관되는데, 이미지와 비교해서 묘사가 부족한 문학적 차원이 특히 그렇다. 개별적 종결의 흐름은 독자의 무의식에 의해-이를테면 동일시 현상의 관점에서 볼 때-크게 결정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p202 우리가 각 텍스트에 우리 자신을 기입함으로써, 우리의 언어로 말하게 함으로써 텍스트를 변형한다면 모든 문학 토론은 근본적으로 귀머거리들의 대화다. 왜냐하면 연구되는 텍스트들 하나하나가 전체적 배열에서도 그렇고 각각의 요소에서도 그것을 해설하는 사람들의 주관성에 의해 재편성되었기 때문이다.
p231 동일한 한 텍스트에 대한 십여 개의 독서를 모으면 불안한 낯설음의 효과를 낳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인용하거나 언급한 독서의 대부분은 흥미롭다. 이들 독서가 텍스트의 진실에 어느 정도 도달했다고 간주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작품을 둘러싸고 개인적인 세계를 구축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한 세계에서 일부 독자들은 그들 고유의 세계의 요소들을 재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확실한 것이 되기 위해 개별적 텍스트 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데 도달한 비평 방식은 독창성을 가장 덜 제시할 우려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 방식은 무의식의 주체의 모든 개입을 피하고 주석에 해당하는 해설을 선호해야 할 것이다.
개별 텍스트 사이의 격차를 줄이려는 이런 방식과 반대로 우리가 주장하는 방식은 오히려 다양성을 추구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방식과 일치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수많은 텍스트 가운데 하나인 자기 고유의 텍스트 속에서 작품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또한 중요한 보완 작업을 고수하려고 시도할 것이며, 그를 통해 각 독자와 작품 사이에 매개적 인물이 창조될 것이며, 그 작업을 통해 우리 자신도 작품의 인물과 주민이 될 것이다. 이 방식은 있을 법하지 않아 보이는 이런 존재들에게, 우리 세계로 이민 와서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비평이 만들어낸 모든 햄릿들에게 시민권과 발언권을 부여할 것이다. 독서 활동에 다름 아닌 이 작용을 파기할 것이 아니라 북돋우는 것이야말로 비평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귀머거리들의 대화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각 텍스트 안에서 길을 잃은 두 이야기의 교차에서 각 사람과 각 이야기에 가장 고유한 말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과의 조화를 되찾음으로써 결국 수립하게 되는 건 바로 자기 자신과 동일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p56 텍스트는 작품이 쓰이고 난 이후에, 그것도 글쓰기로부터 한참 멀어져서 독서 중에 개별적인 탄생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보편적 텍스트라는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으리라는 희망 없이 비평 탐구를 위한 새로운 영역으로 제시된다.
p64 문학 작품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그 불완전함이 어떤 것이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문학 작품도 완벽한 세계를 이루고 있지 않다. 문학 작품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서 요소들을 빌려오지만 세계를 통째로 보여주거나 체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개입 없이는 충분하지 않을 단편적인 정보들만 제공한다. 그러므로 이 불충분한 문학 공간을 세계의 조각들이라 말해야 더 맞을 것이다.
그렇기에 독서와 비평 작용이 이 세계를 보완할 수밖에 없다. 데이터가 부족한 곳에 데이터를 보태고, 묘사를 완성하고, 미완의 생각을 잇고, 텍스트에 과거와 미래를 지어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작품은 각 독자를 통해 연장되며, 독자는 작품 세계에 살면서 자신을 위해 임시로 작품을 완성한다. 이 개별적 종결은 작품의 모든 차원과 연관되는데, 이미지와 비교해서 묘사가 부족한 문학적 차원이 특히 그렇다. 개별적 종결의 흐름은 독자의 무의식에 의해-이를테면 동일시 현상의 관점에서 볼 때-크게 결정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p202 우리가 각 텍스트에 우리 자신을 기입함으로써, 우리의 언어로 말하게 함으로써 텍스트를 변형한다면 모든 문학 토론은 근본적으로 귀머거리들의 대화다. 왜냐하면 연구되는 텍스트들 하나하나가 전체적 배열에서도 그렇고 각각의 요소에서도 그것을 해설하는 사람들의 주관성에 의해 재편성되었기 때문이다.
p231 동일한 한 텍스트에 대한 십여 개의 독서를 모으면 불안한 낯설음의 효과를 낳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인용하거나 언급한 독서의 대부분은 흥미롭다. 이들 독서가 텍스트의 진실에 어느 정도 도달했다고 간주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작품을 둘러싸고 개인적인 세계를 구축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한 세계에서 일부 독자들은 그들 고유의 세계의 요소들을 재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확실한 것이 되기 위해 개별적 텍스트 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데 도달한 비평 방식은 독창성을 가장 덜 제시할 우려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 방식은 무의식의 주체의 모든 개입을 피하고 주석에 해당하는 해설을 선호해야 할 것이다.
개별 텍스트 사이의 격차를 줄이려는 이런 방식과 반대로 우리가 주장하는 방식은 오히려 다양성을 추구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방식과 일치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수많은 텍스트 가운데 하나인 자기 고유의 텍스트 속에서 작품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또한 중요한 보완 작업을 고수하려고 시도할 것이며, 그를 통해 각 독자와 작품 사이에 매개적 인물이 창조될 것이며, 그 작업을 통해 우리 자신도 작품의 인물과 주민이 될 것이다. 이 방식은 있을 법하지 않아 보이는 이런 존재들에게, 우리 세계로 이민 와서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비평이 만들어낸 모든 햄릿들에게 시민권과 발언권을 부여할 것이다. 독서 활동에 다름 아닌 이 작용을 파기할 것이 아니라 북돋우는 것이야말로 비평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귀머거리들의 대화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각 텍스트 안에서 길을 잃은 두 이야기의 교차에서 각 사람과 각 이야기에 가장 고유한 말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과의 조화를 되찾음으로써 결국 수립하게 되는 건 바로 자기 자신과 동일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평생문학공부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 (0) | 2011.08.28 |
---|---|
32년생 젊은 소설가 에코의 고백 (0) | 2011.08.07 |
유종호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0) | 2011.05.11 |
읽지 않은 책에 대하여 말하는 법 (0) | 2011.04.28 |
날마다 좋아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능력 (0) | 2011.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