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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문학공부센터

읽지 않은 책에 대하여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를 직접 만나게 되는 자리에 앞서 재독, 정말이지 흥미진진한 책이다.

p26 독서는 우선 비독서라 할 수 있다. 삶을 온통 독서에 바치는 대단한 독서가라 할지라도, 어떤 책을 잡고 펼치는 그 몸짓은 언제나 그것과 동시에 행해지는, 그래서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그 역逆의 몸짓을 가린다. 즉, 그 책 외의 다른 모든 책들, 어떤 다른 세상이었다면, 선택된 그 행복한 책 대신 선택될 수도 있었을 다른 모든 책들을 잡지 않고 덮는 몸짓을 가리는 것이다.

p56 무질과 마찬가지로 발레리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집단 도서관의 어법으로 사유하도록 부추긴다. 문학을 깊이 성찰하고자 하는 진정한 독자에게는 어떤 책 한 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책들이 중요하며, 어떤 한 책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그런 총체적 시각과, 그 책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줄 보다 폭넓은 어떤 구성에의 참여를 망실케 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p88 책들이 단지 지식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기억 상실, 즉 정체성의 상실과도 관계된 것이라는 사실은 독서에 관한 모든 고찰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요소다. 이 요소를 고려하지 않으면 텍스트 접촉의 긍정적이고 축적적인 측면만 헤아리게 될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단지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는 것-어쩌면 이 점이 더 크다-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자신에 대한 망각과 대면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p121 우리의 개인적인 여러 가지 전설들과 각 개인 특유의 환상들로 짜인 이 개인적인 내면의 책은 우리의 독서 욕망 속에, 다시 말해서 우리가 책을 구하고 읽는 그 방식 속에 작용한다. 이 내면의 책은 독자가 일생을 통해 추구하는 환상적 대상이다. 독자가 생을 통해 만나게 될 최고의 책들이란 단지 책 읽기를 계속하도록 그를 자극하는 이 내면의 책의 불완전한 조각들에 불과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작가가 하는 일이란 바로 자기만의 이 내면의 책을 추구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자신이 마주치는 책들이나 자기 자신이 쓴 책들-아무리 완성도가 높다 할지라도-에 대해서도 언제나 불만족스러워 하면서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부단히 추구하고 다가가지만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완벽한-다시 말하면 자신에게 부합하는-책에 대한 그러한 이상적 이미지가 없다면 어떻게 글쓰기를 시작하고 또 계속 글을 써나갈 수 있겠는가?

p229 독서의 패러독스는 자기 자신을 향한 길이 책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저 통과만 하고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각각의 책이 자기 자신의 일부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훌륭한 독자, 그런 독자에게 책들에 멈추지 않는 지혜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바로 그런 '책 가로지르기'를 행할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우리가 발레리라든가 롤로 마틴스, 혹은 나의 학생들 같은 아주 다양하고 영감에 찬 독자들에게서 살펴본 것도 바로 그런 식의 가로지르기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개략적으로 알고 있거나 아니면 전혀 모르는 어떤 작품의 일부 요소를 파악하여, 나머지 내용에 개의치 않고 자기 고유의 성찰 속으로 들어가 자신만의 시각을 놓치지 않고자 했다.
 우리가 분석한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들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책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얘기를 하는 것, 혹은 책들을 통해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것이 아마 책들에 대해 잘 말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런 상황들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달라진다. 접근 가능한 몇 가지 자료들에 입각하여 무엇보다 우선 중시해야 할 것은 바로 작품과 자기 자신, 그 둘 사이의 다양한 접점들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 집단 도서관에서 그 작품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 그 작품을 회상하는 사람의 개성, 구두로나 글로 의견 교환이 이루어질 때의 분위기 등-물론 이것들 외에도 다른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은 바로 작품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고 자기 얘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구실들이라고 오스카 와일드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