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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독서/한 권의 책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

 요즘 아트앤스터디에서 신형철의 소설 강의를 하나 열심히 듣고 있다. 작가의 작품을 여러 철학서와 문학연구서를 바탕으로 차분히 분석하는 수업이라 조금씩 성장하는 내가 느껴진다. 특히 좋은 개론서나 소설을 추천해주는게 좋아서 강의를 다 듣고는 언급한 책을 검색하는 재미에 맛들렸는데, 이 [마음의 사회학]도 그 중의 하나이다. 폭넓은 배경지식과 지적인 언어의 향연에 읽는 내내 즐거웠다. 문학비평서는 아니지만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오는 문학적인 문장들과 개념들에 영감을 받은 장면들도 한두개가 아니다. 이렇게 쓰려면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려나?


39쪽, 진정성(authenticity)은 본래 좋은 삶과 올바른 삶을 규정하는 가치의 체계이자 도덕적 이상으로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을 가장 큰 삶의 미덕으로 삼는 태도를 가리킨다. 진정한 자아의 실현이 대개 사회적 모순, 억압, 문제 등에 등에 의해 좌절되기 때문에 진정성의 추구에는 언제나 사회의 공적 문제에 대한 격렬한 항의, 비판, 참여가 동반된다. 서구의 경우 진정성의 문화, 진정성의 정치, 진정성의 윤리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공유되어 인정받게 된 것은,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청년 대학생들의 '신좌파'운동을 계기로 해서이다. 그러나 진정성의 이상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 역사적 토양이 결국 자아와 사회의 변증법적 충돌이라면, 그것은 사실 '근대적 주체'의 형성과 그 역사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여러 논자들에 의해서 지적된 바와 같이, 진정성의 윤리는 루소와 헤르더 이후의 낭만주의에서 시작되어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적 감성 속에 구현되어 있는 도덕적 기획으로서,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사회적 역할과 자신의 고유한 욕망 사이에 형성된 간극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근대적 주체의 자기 통치 기획의 한 양태이다.


 말은 어려운데 내가 이해한 진정성의 개념은 '내가 나답게 사는 방법의 탐구'이다. 이 혼란의 사회 속에서 내가 나로써 살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나?를 적극적으로 연구하는 삶의 태도.


53쪽,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진정성이란 외부에서 부과되는 도덕률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솟아나오는 목소리인 참된 자아와의 대화에 의거하여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러한 진정성의 관념은, 인간이 옳고 그름에 대한 천부적인 도덕관념을 부여받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18세기적 사유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루소나 헤르더 등의 낭만주의자들이 주창했던 소위 '존재감'이나 '자기 고유의 척도'와 같은 관념에 의해 적절하게 표상되고 있다. 진정성의 관념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외재적인 도덕이 강조하는 바를 자신 고유의 내면 공간으로 이동시켜 반성하는 일이다.


97쪽, 이런 의미에서 윤리적 삶에 주어지는 두 가지 대표적인 명령은 '너 자신을 알라'와 '너 자신을 배려하라'이다. 자신에 대한 인식은, 상징계가 부여한 어떤 정체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나의 '실재'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는 것이며, 자신에 대한 배려는 자신이 외부의 힘에 의해서 형성될 때 발생하는 종속과 중독 그리고 의존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의미이다. 윤리의 목적은 자유이다. 자유를 위해서 윤리적 인간은, 실재와 타자와 보편으로 가는 길을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언제나 '문제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것은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구원을 추구하는 소설 주인공들의 삶이거나(루카치), 크레온의 법에 대항하여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추구했던 소포클레스 비극에 등장하는 안티고네의 삶이다(라캉). 도구적 성찰성에 의해서 질서 잡힌 삶, 정돈되고, 계획이 세워지고, 규칙에 포섭된 삶을 윤리적 성찰은 다시 무궁한 혼돈에 빠뜨린다. 윤리의 영역에서는, 공동체의 모럴이 제공하는 확고한 해답(성공)이 의심되고 부정된다. 윤리적 성찰이 듣고 싶어하는 내면의 목소리 즉 양심은 '오직 침묵하면서 부를 뿐이다'(하이데거). 


 이런 진정성의 존재들은 근대문학의 핵심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근대문학은 어느 순간 '종언'을 맞고 이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문학과 사회의 풍경을 제시하면서 저자는 여러 근대의 '마음의 풍경'을 제시하고 분석한다. 이 부분은 이해하기가 까다로워서 읽기가 어려웠지만 '멜랑콜리와 모더니티'에서 보여준 우울자의 모습은 흥미롭다. 


232쪽, 현실원칙에 굴복하여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애도자와 달리 우울자는 자신이 상실했다고 상상하는 '그것'을 끊임없이 찾아서 떠나야 하는 '방황하는 유대인'에 비유되며, 영원한 애도의 상태 속에 존재하는 무기력자로 묘사된다. 모든 토성적 정조의 주체들이 감정적 무능에 시달리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사회적 모더니티의 지배적 주체는 합리적인 계산과 이성에 근거하여 세계와 대면하고, 세계를 분절하고, 측량하며, 지배함으로써 세계의 주인이 된다. 이와 반대로, 우울자는 대면할 세계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지 못하고, 세계를 분절할 수 있는 경계를 상실했으며, 객체적인 세계에 의해서 지배되는 주체이다. 그는 정서의 욕동을 단호하게 억제하면서 미래를 투기하지 못하고, 토성적 정조에 사로잡혀 현실원칙으로 귀환하지 못하는 욕망의 노마드이다. 이러한 식인증적 주체가 상징화되었을 때, 그는 전형적인 탐구자 혹은 연구자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많은 우울자들이 맹렬한 독서가이자 또한 가차 없는 수집가이자 늘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 독서인으로 표현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부분은 책의 3부인 마음의 징후-사회학적 비평의 가능성이다. 여기서 저자는 이상, 김수영, 미래파, 하루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대상으로 명쾌한 비평의 향연을 펼친다. 이상의 분석에는 소름이 끼치고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는 수긍이 갔으며 마지막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행복의 모습이 무엇인지 제시한 풍경은 감격스러웠다. 


435쪽, 하루키보다 더 절망적으로 '우리의 삶은 결정적 파국 이후의 삶'이라는 사실을 일러준 작가는 흔치 않다. 그보다 더 무심하고 차갑게 종언 이후의 삶의 궤적을 그려준 작가도 드물다. 하루키의 소설은 세계의 정치적, 이념적, 문화적 지각변동을 가장 드라이한 그래프와 곡선만으로 묘사해준 문학적 지진계였다. 하루키에 대한 광범위한 열정의 근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루키 문학의 이런 지진계적 정직성에 대한 신뢰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는, 이제 더이상 선험적으로 주어진 의미의 지반을 딛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론적 지진의 상태 속에 던져진 개인들이 고함을 지르거나 세상을 저주하거나 타자들을 증오하거나 자학이나 위악과 같은 포즈에 탐닉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최소한의 인간적 자세를 유지하면서 생존할 수 있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만 했던 삶의 기술들을 90년대의 인간들에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그 기술에는 음악을 듣는 법, 요리를 하는 법, 농담을 하는 법, 테니스를 치는 법, 술을 마시는 법, 친구를 사귀고 이성을 유혹하는 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파산된 교양의 시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교양소설이었으며, 서로 소통해야 하는 절대적 필요가 사라진 시대에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법, 환원하면 사회를 만드는 법에 대한 강의였다.


461쪽, 오즈의 카메라가 나직하게 깨우치는 것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매일매일 지겹게 바라보고 지겹게 스쳐가는 현실의 진부한 세목들이, 진지한 사유와 반성이나 관심의 대상으로 단 한 번도 정립된 적 없었다는 '현상학적'사실이며, 새롭게 다시 나타날 때 그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진실하다는 '미학적' 사실이며, 바로 그런 부재와 현존의 변증법적 변환을 겪는 세속적인 삶이 곧 구원의 대상이자 동시에 그 결과라는 '신학적' 사실이다. 오즈의 카메라는 일상적 삶의 목표라 할 수 있는 '행복'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담백하게 일러 깨운다. 사람들이 삶 속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어떤 강렬하고 불타오르는 기적의 실현이나 열정의 폭발, 쾌락이 아니라 사실은 작고 소박한 꿈의 충족일 뿐이다. 그들은 사랑하고, 사랑받길 원하며, 안전과 여유를 소망하며, 그런 상태의 지속을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는 것이다. 일상, 세속 그리고 생활의 모든 사업들은 결국, 북극성을 향해 회전하는 별들처럼, 행복의 상태를 영원히 지향한다.


470쪽, 벤야민의 메시아는 인격화된 신이나 영원히 오지 않는 절대적 타자가 아니다. 과거의 모든 세대가 기다렸던 메시아,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 과거의 모든 세대가 염원한, 새로운 미래의 시간에 지상에 출현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메시아는 우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 세계의 변화를 실현할 수 있는 (약한)능력이자, 그 변화가 이루어질 시간 그 자체이다. 메시아는 이미 여기에 도래해 있다. 이처럼 (약한)능력과 시간이 육화된 유일한 존재인 우리가 바로 메시아인 한에서, 메시아가 행할 수 있는 구원의 이미지는, 초인도 비인간도 신인류도 아닌, '언니네 이발관'의 한 노래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가장 보통의 존재'에 다름 아닌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한 삶의 작은 가능성으로 집약되는 것이다. 그 행복을 벤야민은 물질의 완강한 신진대사, 일상적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들, 사랑의 형식들, 요컨대 무상하고 덧없는 현세적 삶의 논리에서 찾고 있다.


 일상의 행복, 우리가 바로 그 메시아라는 깨달음, 찰나의 순간, 현세, 빛의 그 순간, 문학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아니, 죽을 수가 없다. 이야깃거리가 이렇게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