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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

 또렷하게 기억난다. 고 3때 (무슨 이유인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장정일의 독서일기]6권을 도서관에서 빌려다 무턱대고 읽은 기억이 난다. 간간히 아는 책이 나오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제목부터 생소한 책들에 대한 일기를 단지 허영감에 도취되어 줄줄 읽어내려갔다. 거기서 뽑아낸 리스트에 [소피의 선택]이 있었다. 왜 당시에는 절판되었던 이 소설을 따로 읽어보려고 했을까? 그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3년이 지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목록에 이 책이 끼어들게 되면서, 무의식중에 익숙하고 반가운 마음에 냉큼 도서관에 예약신청을 했고, 8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하고 무거운 소설을 일주일 만에 다 읽어치웠다.
 정말 두껍고, 정말 무겁고, 정말 어둡고, 어렵고, 까다로웠다. 아우슈비츠라는 소재 하나만으로도 이만큼 되는 분량의 소설이 될 수 있을텐데, 여기에 유대인 문제,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 전쟁, 폭력, 문학, 프로이트로 대변되는 1950년대 당시의 심리학, 성性, 사랑, 문학, 문화, 아무튼 온갖 주제들이 여기에 다 담겨져 있다. 이 주제들이 서로 엉키거나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질서정연한 체계를 갖춰 독자에게 다가올 수 있는 기반은 각 주제를 상징하는 세 명의 주인공들이 소설 속에 굳건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2차 대전의 한가운데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인 폴란드인 소피와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유대인이라는 굴레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그녀의 연인 네이선, 그리고 이 둘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문학지망생이자 노예를 소유했던 집안에서 자라난 미국 남부인 스팅고까지. 또렷한 개성과 존재감을 가진 이 등장인물들이 서로 부딪히는 과정에서 생겨난 빛과 어둠이 내게 긴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나가게 했다. 수많은 주제들, 그중에서도 제목에서도 나타나 있는 '선택'의 딜레마, 그리고 밑에 길게 인용해 놓은 '시간 관계'에 대한 깨달음, 비극적인 운명과 사랑,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아직도 '문학은 죽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386p "그동안 이에 대해 많은 글을 쓰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 중의 하나는 시간 관계다." 스타이너의 글이다. 죽음의 수용소 트레블링카에서 끔찍하게 학살된 두 명의 유대인들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메링과 랭그너가 죽어 가고 있던 바로 그 시각,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폴란드의 어느 농장에서, 혹은 8000킬로미터 떨어진 뉴옥에서,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치과 치료를 기다리며 걱정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내 상상력은 멈춰 버리고 만다.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보편적인 인간 가치에 비추어 보더라도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달라서, 그리고 그런 판이한 성격의 일들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이 너무도 끔찍한 모순처럼 느껴져서-누군가가 트레블링카를 세웠고 다른 누군가는 이 시설이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지 않았는가-시간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나는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공상 과학 소설이나 그노시스파의 추론이 암시하듯, 이 세상에는 다른 두 종류의 시간이, '선한 시간'과 인간을 생지옥의 손아귀로 몰아넣는 '비인간적인 시간'이 존재한단 말인가?
 이 글을 읽기 전까지 나는 단순하게도 나만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나만이 시간 관계에 집착해서 심지어 소피가 아우슈비츠라는 '생지옥의 손아귀'로 들어가던 1943년 4월의 첫날 나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고 생각했다. 소피의 시련이 시작되고 나서 불과 몇 해가 지나지 않은 1947년 말의 어느 날, 나는 소피가 생지옥의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던 바로 그 날 나는 어디 있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기억을 뒤져 보았다. 1943년 4월 1일 만우절은 내게도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난 날인 것 같아 아버지가 보낸 편지들을 뒤져 본-편리하게도 내 어렴풋한 기억을 확인해 주는 유용한 자료였다-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소피가 아우슈비츠 역 플랫폼에 첫발을 내디뎠던 그날 오후, 노스캐롤라이나 주 롤리는 화창한 봄날 아침이었고, 나는 거기서 미친 듯이 바나나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은데도 계속 바나나를 먹었던 기억이 아는데, 그로부터 한 시간 뒤에 해병대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열일곱의 나이에 키는 벌써 180센티미터가 넘었지만 몸무게는 55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았는데, 입대를 위한 최소한의 요건을 맞추기 위해서는 1.5킬로그램은 더 찔 필요가 있었다. 굶주린 난민처럼 불룩 튀어나온 배를 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체중계에 올라갔더니 앞에 앉아 있던 건장한 징병 담당 병장이 키만 훌쩍 크고 빼빼 마른 내 몸을 노려보면서 "세에상에"라고 조롱섞인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는 몇백 그램 차이로 간신히 신체검사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날까지 나는 아우슈비츠나 강제 수용소,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의 대량 학살에 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나치에 대해서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게 있어 그 세계 대전의 적군은 일본군이었고, 아우슈비츠나 트레블랑카, 베르겐 벨젠 같은 수용소 위를 떠도는 회색의 독가스 같은 고통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이, 아니 나치 공포 정치의 바깥에 살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았던가? 스타이너는 이렇게 말한다. "그곳에 있지 않았던, 그리고 마치 다른 행성에 살았던 것 같은 우리에게는 동시적이기는 하나 효과적으로 비교하거나 의사소통할 수 없는 다른 종류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개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뱀꼬리@ 작가소개를 읽다가 제작년에 우울증에 시달리던 내게 한 가닥 실마리를 보여주었던 [보이는 어둠]의 저자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더 찾아보니 2006년에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대학에 막 입학한 새내기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