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보보끄, 보보보끄

 권여선의 <약콩이 끓는 동안>을 읽다가 보보크라는 단어가 나와 궁금해서 찾아 보았다.
 알고 보니 그 러시아 작가는 우리도 친숙한 도스토예프스키, 글은 다소 충격적으로, '좀비'를 다루고 있었다! 정말 깜짝 놀랐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곰곰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리라는 생각, 그 사람의 눈앞에 지나온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가리라는 편견은 참으로 낭만적인 상상이었다. 살아갈 날이 충분할 때에만 무엇인가를 열심히 지키고 보존하는 일이 중요했다. 미래가 적은 사람들에게는 과거나 기억도 적었다. 상욱이 이제껏 지켜봐온 노인이나 폐인들은 집요하게 현재적이었다. 죽음에 가까울수록 그들은 현재에만, 오직 찰나에만 집착했다. 그렇게 기억의 보따리가 지나치리만큼 가벼워져 거의 비인간에 가까워진 종족을 일컫는 이름을 상욱은 얼마 전 책에서 발견했다. 그 이름은 보보크 또는 보보보크였다.
 어느 러시아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서 죽은 자들이 죽은 후에도 얼마간 삶을 지속한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펴고 있었다. 그 작가에 따르면 육체적 생명이 끊어진 후에도 정신적 생명은 마치 자신의 관성을 쉽게 그만두기 아쉽다는 듯 여분의 삶을 산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무덤 속에 거의 완전히 부패된 시체가 있다고 하자. 육체는 썩었어도 죽은 자의 의식은 몇 주일이나 몇 달에 한 번씩 깨어나 갑작스레 무슨 말은가를 내뱉는다는 것이다. 귀를 기울이면 콩알이란 의미인지 뭐라는 의미인지 보보크, 보보보크라고 하는데, 물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었다.
 상욱은 이 대목을 여러 번 반복해 읽다 완전히 중독되고 말았다. 삶 너머에 있는, 아니 어쩌면 삶 내부에도 있을지 모를 그런 처절한 무의미의 빈터를 보보크라고 부를 수 있다면, 상욱은 자신의 보보크는 과연 무엇일지 궁금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보보크를 알기 위해 지루한 삶을 끝까지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그는 거의 매일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노래방에서 뻗어버리곤 했는데, 똑같은 식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똑같은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똑같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똑같은, 개체는 다를지 몰라도 계열은 똑같은 여자와 블루스를 출 때, 그리고 급기야는 노래방 한구석에 처박혀 똑같은, 산란하고 섬광처럼 짧은 잠을 잘때 그는 문득 옹알인지 콩알인지 모를 무의미한 버벅거림이 반 토막난 벌레처럼 기어나오다 마는 듯한 추잡한 희열을 느끼곤 했다. 그 잘리지 않은 온 토막이 그가 죽어 무덤에서 남김 없이 썩은 후에 내뱉을 그만의 보보크일 것이었다.
<약콩이 끓는 동안> 권여선


 그는 아주 간단하게 이 모든 일을 설명하고 있습죠. 요컨대 저 위에서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생각했던 죽음은 사실은 죽음 뒤의 죽음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육체는 여기서 다시 소생하는 것처럼 되면서 생명의 잔재가 응축되는데, 그것은 다만 의식 속에서일 뿐이지요. 요컨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관성에 의해서 삶이 지속된다고나 할까요.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것이 응축된 채로 의식 속 어딘가에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석 달이고 계속된다는 겁니다....어떤 때는 반년이나 가는 수도 있지요. 여기 그 예로 썩을 대로 썩은 시체가 하나 있는데, 그는 6주에 한 번씩 느닷없이 꼭 한마디를 중얼거립니다. 물론 아무 뜻도 없는 말입죠. 무슨 보보끄라나. <보보끄, 보보끄.> 다시 말해서 이 남자의 내부에서 생명이 아직도 희미한 불꽃으로 타고 있다는 것이지요...
<보보끄> 도스토예프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