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문학의 미래

15p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루쉰은 일본 유학 초기에 의학 공부를 했다. 그러나 중국의 사회 상황은 자신의 문학적 역할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고 작가의 길로 들어서서 많은 수작을 써내 20세기 중국 문학의 거장이 되고 사회의 스승이 되었다. 의사를 뜻하는 '닥터'는 본시 가르친다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루쉰은 당초 개인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를 지망했으나 전신을 통해서 사회의 병리를 치료하고 또 가르치는 어원적 의미의 진정한 닥터가 된 것이다. 헤겔이 말한 '정신의 세속화'과정에서 시인, 작가는 가령 톨스토이나 루쉰의 경우에 분명히 드러나듯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인류의 교사 즉 닥터의 구실을 하며 문학의 위상을 높이고 거기 위엄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러면 21세기의 위기적 상황은 톨스토이나 루쉰과 같은 본래적 의미의 닥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과연 그러한 문학 닥터의 도래는 가능한 것일까? 닥터의 출현을 기다리고 수용하고 경청할 풍토가 되어 있는 것일까?
(미지의 문학에 부쳐-문학의 종속은 가능할까?, 유종호)

39p 저는 이제 다시 생각합니다. 한 도시의 샴페인 거품과도 같이 찬란한 불빛 속에 문학이라고 하는 작은 등불이 포함되어 있으리라고 말입니다. 문학은 등불이지만, 이 불빛은 결코 눈을 부시게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등불이 콩알만큼 작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을 비추고, 사상의 표정을 비추어 밝힐 수 있다면 영원히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두운 내면은 문학이 다가와서 밝혀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문학은 등불이다-동서 문학의 고전과 나의 문학 이력, 티에닝)

81p 오랫동안 지워져 있던, 혹은 방만하게 상품화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동아시아적인 서정적 서사, 동(친)화적 자연관이 21세기에 다시 불러내야 할 문학적 숨결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세계는 너나 할 것 없이 이 숨결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이 자연 친화적인 숨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구하게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그건 귀의가 아니라 회복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는 세계에 존재의 집을 지어주는 일입니다.
 저는 또 오랫동안 이 지역의 유교적 전통 안에서 문인들이 경계해왔던 문약文弱을 오히려 칭송합니다. 그것은 문학에 문학 이외의 기능을 무겁게 부여하던 때의 경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학은 무한히 약한 것이고 21세기에는 더 약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정치도, 경제 행위도 아닙니다.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런 활동들의 존재 이유를 제공하며, 그 활동들을 의미 있게 하는 그 무엇에 관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그 활동들 훨씬 이전에, 어쩔 수 없이 예언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어떤 것입니다. 그럴 때 동아시아의 문학이 세계의 미래에 커다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내면이 강한 자만이 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문약은 하나의 반어법적인 수식임이 분명합니다. (다중심적 세계화, 동아시아 문학, 최윤)

86p 여러분도 알다시피 작가는 단지 자기 개인의 창작 의욕만으로 작품을 쓰는 게 아닙니다. 어떤 작가도 반드시 독자를 의식합니다. 독자를 의식하는 것을 시대와 대치한다고 표현하는 작가도 있습니다. 거듭 말합니다만, 문학은 언어예술입니다. 그리고 언어란 도예가가 갖고 있는 점토처럼 작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언어는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 재산입니다. 언어예술인 문학은 이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 재산을 소재로서 사용합니다. 어느 누구에게 읽힐 생각도 없이 그저 남몰래 쓰여지는 작품조차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 재산인 언어가 소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작가는 언어를 통해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바로 독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서로 뒤섞이고 녹아드는 세계 속에서, 나카자와 게이)

106p 이게 바로 지금 우리가 직면한 사태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사람과 비슷하다. 지금 우리 앞에는 그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이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서 우리가 파악할 방법은 없다. 우리의 만성적인 불안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타인을 마주할 때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이 불안에는 원인이 부재하므로 다만 견디는 수밖에 없다. 이 불안을 견디지 못하면 관계는 붕괴된다. 이 불안을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느냐는 오직 사랑의 깊이에 달려 있다. 연애를 하다보면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겠지만, 생각만큼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연애를 그만둘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불안을 견디는 행위를 자처하는 셈이다. 사랑을 위해 병의 치유를 거부하는 것, 이게 바로 타자를 대면한 햔대인의 (거부할 수 없는) 윤리다.
(비통할 정도, 또는 우스울 정도로 묘한 얼굴, 김연수)

125p 어떤 의미에서 나는 '작품의 핵심은 풍격과 구조에 있다. 위대한 사상이란 속이 빈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한 나보코프의 관점에 동의한다. 문학이 만약 성숙한 각종 풍격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헌으로서의 의미밖에 없는 문서에 불과할 것이다. 그저 남을 따라하는 식의 문학과 그것이 묘사한 시대는 결국 사라져버릴 것이다. 나는 적절한 묘사를 거치지 않는 삶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일관되게 생각해왔다.
(동서 문학의 경전과 나의 문학 여정, 쑨깐루)

166p 본래 문학자라는 것은 비꼬는 자세로 사회와 대치하고 있는 이단적 존재이다. 그들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범죄자의 심리를 독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릴 있는 행위인 것이다. 소설가의 무의식을 비평가가 독해하면 꿈을 꾸는 사람과 꿈을 읽는 사람의 이상적인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요즈음 비평가는 문학 시장의 딜러로 변모했기 때문에 양식 있는 작가는 1인 2역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 작가들은 정신과 의사나 뇌 과학자나 비평가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스스로 꾸는 꿈의 도움을 받는다. 그들은 과감하게 꿈의 황당무계함과 마주해서 스스로를 결박하는 상징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작품을 계속 써나갈 것이다.
(극동의 이단자, 시마다 마사히코)

223p 그렇지만, 현실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라는 문제는 여전히 문학의 당위성이자 존재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현실은 인간의 삶 자체이고, 그것은 곧 사회와 역사의 현실에 필연적으로 기반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이런 얘기가 나오면 제기되곤 하는, 문학이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 하는 복잡한 논제에 관하여는 이 자리에선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문학은 응당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고,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세계는 '변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과 세력들의 담합에 의해 대부분 지배되어왔고 또 현재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에도 강대한 힘을 가진 나라와 집단에 의해 지구상엔 수많은 전쟁과 폭력이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고, 그 위험성은 우리 안팎에도 여전히 상존합니다.
(기억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소설, 임철우)

273p 풍격과 성정의 결합은 일종의 인생의 경지이다. 진정한 경지의 인생은 항상 엄숙하고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그런 것이 아니며, 항상 노기충전, 기세등등하게 눈을 부릅뜨고 눈썹을 치켜올리는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통달함과 자유로움으로 이루어진 그런 것이다. 작년, 장 선생님과 한담을 나눌 때 장 선생님께서 고시 한 수를 외셨고 나는 그 시에 감동받았다. 문인이란 영달하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부귀하거나 빈한하거나에 상관없이 문인의 기질을 가져야 하며, 문인다운 삶의 정취를 가져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문인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계속 아시아에서 살아갈 것이다, 한스샨)

281p 작가란 인생과 세계를 읽고 해석하기, 보다 좋은 세상을 향한 꿈꾸기와 실현 등을 글쓰기로 이루어보려는 사람이다.
 내게 있어 글을 쓰게끔 하는 동기는 인간 존재라는 것, 살아간다는 일에 대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느끼는 쓸쓸함과 슬픔의 힘이다.
(나는 무엇을,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쓰는가, 오정희)
 

'미친독서 > 소설의 그림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