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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문학공부센터

존경스러운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

7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일주일에 걸쳐 말없이 읽기만 했다. 이렇게 잘 쓴 글을 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정말이지 너무 잘 쓰신다......

1. 시란 무엇인가

230p 한 편의 시가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었던 때가 있었다는 식의 의심스러운 노스탤지어는 갑갑할 뿐만 아니라 수상하다. 시는 하찮은 것이다. 시가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시는 하찮은 것이지만 다른 대단한 것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주체들이 앓고 있는 증상들을 언어라는 가장 기초적 수단을 통해 표현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시는 가장 근본주의적으로 하찮고 가장 진실하게 사소한 그 무엇이다.

247p 삶이 상투적이다. 따분한 모범생과 유치한 문제아들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세계의 상투성을 보호하고 육성한다. 세계의 상투성은 사유의 상투성이고 그것은 곧 언어의 상투성이다. 혹은 상투적인 언어들이 상투적인 사유를, 상투적인 사유가 상투적인 세계를 만든다. 시란 무엇인가? 상투형과의 전면전이다. 시는 후기자본주의, 한미FTA, 양극화 등과 직접 싸우지 못한다. 시는 세계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상투적인 방식과 싸운다. 우선 상투적인 언어들을 전복할 것, 그를 통해 사유를 전복하고, 가능하다면 세계를 전복할 것. 이것이 시인 카타콤의 조직 강령이다. 서사를 장착할 필요는 없다. 교훈도 옵션이다. 언어 그 자체를 직접 타격한다. 이것이 시인 카타콤의 행동 강령이다. 상투형을 인식할 능력이 없거나 그것과 타협한 시인들을 시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상투적인 것은 시의 극우이고, 상투형의 전복은 시의 제1윤리다.

282p 우리는 시를 이해하기 좋은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시인은 '이미 존재하는 인간'을 향해 말을 걸기보다는 '장차 도래할 인간'을 향해 말을 걸어야 합니다.

419p 비밀을 다룰 줄 아는 이가 시인이다. 비밀을 잘 다루는 일은 '나에게는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감추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비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된다. 완벽하게 단속된 비밀은 비밀이 아니다. 얼굴의 반만을 드러낸 여인처럼 절반만 말해진 비밀이 진짜 비밀이다. 비밀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되 그 비밀의 내용을 요령껏 감출 때 비밀은 매혹적인 것이 된다. 시가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독자는 시의 인질이 된다. 말해지지 않은 나머지 절반이 내 욕망의 원인이 되고, 그때 그 절반은 때로 전체보다 더 커진다. 본래 모든 욕망은 A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A안에 있다고 간주되는 'A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라고 라캉은 말하지 않았던가. 이상이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실화>이라고 했을 때, 그는 '나의 비밀'이 곧 '너의 욕망'을 창출하는 동력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509p 시인은 병 없이 앓는 자다.

574p 연애시라는 것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더럽고 지겨운 연애시를. 그러나 연애시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는 우선 '나' 혹은 '너'에 대해서 말한다. 이 둘이 시의 X축과 Y축을 만든다. 이 2차원의 공간에 (대개 긍정적인)'자연' 혹은 (대개 부정적인)'사회'가 제 3의 축으로 가세하여 시라는 3차원 입체의 공간을 만든다. X축과 Y이 제 3의 축과 맺는 관계는 아주 섬세해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자연 혹은 사회가 나와 너를 덮어버리면 시는 1차원으로 추락할 것이다. 좋은 시인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과 사회를 말할 때에도 나와 너의 관계 속으로 끌어들여 말한다. 반대로 자연 혹은 사회라는 제 3의 축이 삭제되면 당연히 나와 너의 관계는 2차원 평면 안에 갇힐 것이다. 좋은 시인들은 이 사실 역시 잘 알고 잇다. 그래서 그들이 나와 너의 관계를 천착할 때 거기에서는 자연 혹은 사회가 함께 움직인다. 그래서 우리는 '연애시'라는 명칭을 섬세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인이 '더럽고 지겹다'고 말한 것은 아마 2차원 안에 갇힌 연애시일 것이다. 다른 시인이 '모든 시는 연애시'라고 주장할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3차원의 연애시일 것이다. 때로 더럽고 지겹지만, 뛰어난 모든 시는 결국 연애시다.

2. 소설은?

24p 소설과 현실의 관계를 온당하게 살피기 위해서는 소설의 '현실성'을 적어도 세 가지 층위에서 검토해야 한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특정한 '세계'에서 특정한 '문제'를 설정하고 특정한 '해결'을 도모하는 서사전략이다. 그러니 세계의 현실성, 문제의 현실성, 해결의 현실성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입체적인 시공간에서 특히 의미 있는 한 부분을 도려내어 서사의 무대로 삼을 경우 '세계의 현실성'이 확보되고, 그 세계 안의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고투하면서 당대의 공론장에서 기꺼이 논의해볼 만한 의제를 산출해낼 때 '문제의 현실성'이 확보되며, 한 사회가 완강하게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좌표를 흔들면서 '문제의 현실성'을 심화, 확장시키는 특정한 선택지를 제출할 때 '해결의 현실성'이 확보된다. 소설의 현실성은 위의 세 단계에서 따로 또 같이 관철되거나 기각될 수 있다.

142p "작가는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로 결정된다." 소설가 츠지 히토나리의 매력적인 단언이다. 비어 있는 목적어의 자리에 '윤리'를 넣고 싶다. 윤리란 무엇인가. 윤리는 우선 도덕이 아닌 그 어떤 것이다. 윤리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리를 도덕이라는 오염된 문제틀로부터 빼내와야 한다. 도덕은 사회가 나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호명하면서 강제하는 습속에 가깝고, 윤리는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명령이라고 칸트에 기대어 말한 것은 가라타니 고진이었다.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 규준에 근거하는 강제적 규율이 도덕이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내재적 규준에 근거하는 임의적 규율이 윤리라고 스피노자에 기대어 말한 것은 들뢰즈였다. 어떤 식으로 말하든 우리에게 자유, 선택, 책임의 세계를 열어놓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윤리라는 층위다. 그리고 그것들 없이 주체는 성립될 수 없다. 윤리의 장에서 우리는 비로소 주체일 수 있다. 어쩌면 주체의 수만큼이나 많은 윤리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도 좋다. 작가는 '에티카(ethica)'를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로 결정된다.

3. 그래서 문학, 그리고 비평

15-16p '시적인 것'이란 이런 것이다. 시적 발화는 '빈말'(하이데거)들을 뚫고 나와 격발한다. 그것은 일상적 발화의 문법들과 냉전하면서 미래를 향해 말의 다리를 놓는다. 예컨대 10여년 전에 강정이 "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너는 죽어야 한다"로 시작되는 시를 썼을 때, 그리고 최근에 김경주가 "황혼에 대한 안목은 내 눈의 무늬로 이야기하겠다 당신이 가진 사이와 당신을 가진 사이의 무늬라고 이야기하겠다"로 시작되는 시를 썼을 때, 그들의 발화는 놀랍도록 분방했지만 그것은 어딘가 제 안의 심연을 대면하고 돌아온 오르페우스의 목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뛰어난 시인들은 대개 그렇다. 이미지가 울리기 전에, 이야기가 설득하기 전에, 메시지가 가르치기 전에, 이미 그들의 발성 자체가 독자적인 힘을 갖게 되곤 하는 것이다. 이런 시인들은 "시를 삶에 대한 가벼운 복수로 여기는 사람들"(토마스 만[토니오 크뢰거])에게 충고한다. 시란 복수가 아니라 창조라고, 제 안의 심연에서 솟아나오는 한 줄의 발화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기념비'(들뢰즈&가타리)가 시라고 말이다. 이런 난공불락의 발화도 가능하다, 라고 '시적인 것'은 말한다.
 '소설적인 것'이란 이런 것이다. 소설적 행위는 타산적인 행위들을 뚫고 나와 작렬한다. 그것은 쾌락원칙의 기율 안에 엎드려 있는 우리를 가격하면서 '쾌락원칙의 피안'을 넘나드는 실존의 심연을 열어젖힌다. 여기, 이오카스테가 울부짖는다. "오오 불행하신 분이여, 그대가 누구인지 결코 알게 되지 않기를!"(오이디푸스 왕)이 절규는 모든 '소설적인 것'들이 작렬하기 직전에 깔리는 무시무시한 전조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를 선택하고 끝내 파멸을 향해 간다. 때로 인간은 이렇게 진실이 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선택하는 제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제 눈을 찔렀다. 그로써 '자기 자신'이기를 선택했다. 이것이야말로 '주체화'의 본래 뜻이다. 이것은 고대의 사례지만 뛰어난 근대소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뛰어난 소설 속의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제 눈을 찌르면서 자기 자신이 '된다'. 그것이 '낭만적 아이러니'(루카치)로 이어지건 '수직적 초월'(지라르)로 이어지건, 그보다 먼저 세계에 맞서 기꺼이 몰락하기를 선택하는 인물 없이는 '소설적인 것'이 발생할 수 없다. 이런 전대미문의 행위도 가능하다, 라고 '소설적인 것'은 말한다.
시와 소설은 그렇게 어떤 '불가피성'을 겨냥한다. 이를 '애매성'(밀란 쿤데라)이라 해도 좋고 '역설'(서영채)이라 해도 좋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를, 이렇게 행위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를 정초한다. 일견 요령부득이지만 기어이 독자를 설복하여 마침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어떤 절대성이 되고 기원이 된다. 이를테면 랭보라는 절대성이 되고 햄릿이라는 기원이 된다. 철학과 정신분석학은 그 불가피성을 해명하려 애쓰는 와중에 자신의 체계를 재정비할 것이다. 그 불가피성은 물론 인간과 시스템의 오작동이지만, 진실은 바로 그 오작동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두를 일러 '문학적인 것'이라 부를 수 있다. 비평가는 시집과 소설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질문으로 전환해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설사 시집과 소설책이 더이상 제작되지 않고 팔리지 않는 22세기가 온다 해도 비평가는 실업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는 기어코 어디서든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을 찾아낼 것이고 그것을 비평할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문학의 종언'(가라타니 고진)을 믿지 않는 비평가가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실업의 불안 때문이 아닐 것이다.

4. ,몰락의 에티카

19p 그 진실의 윤리학을 위해 문학은 있다. 혹은 문학 안에서 그 진실이 솟아오른다. 물론 시와 소설의 역할이 같지 않다. 시는 발화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틈에서 출몰하는 진실을 겨냥하고, 소설은 행위가 감행되고 철회되는 틈에서 발생하는 진실을 조준한다. 그것이 마침내 격발할 때 진실이 분출하고, 문학의 공간은 '사건'(바디우)의 현장이 된다. 본래 모든 사건은 수많은 단서들이 착종되어 있는 거대한 질문이다. 이 진실을 어찌할 것인가. 이제 다시는 진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이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이 난감한 질문들 속에서 사건현장에는 폴리스라인이 쳐지고 비평은 현장검증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문학은 이제 대답하지 말고 질문하라. 문제는 정치(의 윤리)를 위한 대답이 아니라 윤리(의 정치)를 위한 질문이다. 대답하면서 장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면서 장 자체를 개시한다. 윤리의 영역에서 모든 질문은 첫번째 질문이고, 모든 첫번째 질문은 이미 하나의 창조다. 발화의 종말과 행위의 파국에서 시와 소설은 시작된다. 그대 자신의 말을, 그대 자신의 행위를 하라. 이를 무로부터의 창조라 부를 것이다. 문학은 몰락 이후의 첫번째 표정이다. 몰락의 에티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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