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생문학공부센터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읽고 난 뒤 몰려드는 엄청난 지적 충격.....

41p 대부분의 허구에 의한 작품들, 즉 소설에서 작중인물들은 돈키호테보다 더 소박하게 무엇인가를 욕망한다. 여기에는 중개자가 없다. 오직 주체(sujet)와 대상(objet)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주인공의 열정을 불러일으킨 대상의 '본성'(nature)이 욕망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못할 때는 열정에 사로잡힌 주체로 관심을 바꾸게 된다. 그렇게 되어서 주체의 '심리'를 분석하게 되고 주체의 '자유'에 호소하게 된다. 하지만 그래봐야 욕망은 언제나 자연발생적이다. 즉 그 욕망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을 이어주는 간단한 직선을 하나 그리기만 하면 된다.
 그 직선은 돈키호테의 욕망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 직선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 직선 위에 주체와 대상 쪽으로 동시에 선을 긋고 있는 중개자가 있다. 이 삼각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공간적 비유는 분명히 삼각형이다. 이 경우 대상은 사건에 따라 매번 바뀌지만 삼각형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발사의 대야나 페드로의 꼭두각시들이 풍차를 대신한다. 그러나 아마디스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

59p 지금부터 우리는 낭만적이라는 용어를 중개자의 존재를 결코 드러내지 않은 채 그 존재를 반영시키는 작품들에 사용할 것이고, 중개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품들에는 소설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근본적으로 소설적인 작품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62p 자발적 욕망의 진짜 기준은 이 욕망의 강도에 있다. 가장 강렬한 욕망이 열정적인 욕망이다. 허영심으로 인한 욕망은 진정한 욕망의 더럽혀진 그림자이다. 허영심에서 유래하는 것은 언제나 타인들의 욕망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타인들보다 더 강렬하게 욕망한다는 인상을 가지고 잇기 때문이다.

67p 속물은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을 감히 믿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욕망하는 대상들만 욕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유행의 노예인 것이다.

84p 시간을 되찾는다는 것은 타자의 의견 아래 가려져 있던 진짜 인상을 되찾는 것이다. 따라서 낯선 의견을 타자의 의견으로서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자율적이고 자연발생적이기를 멈추는 바로 그 순간에, 간접화의 과정이 우리에게 자율성과 자발성이라는 매우 강한 인상을 일으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시간을 되찾는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실을 피하는 데 삶을 바치고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신에게와 마찬가지로 남에게도 독창적으로 보이기 위해 언제나 타인들을 모방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시간을 되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좀 깎는 일이다.

117p 스탕달은 [한 관광객의 수기]마지막 부분에서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오직 강한 자만이 허영심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에서 약한 자들은 형이상학적 욕망의 희생자가 되며, '선망, 질투 그리고 무력한 증오'라는 현대적 감정들이 승리를 거둔다.
 자유를 정면으로 직시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고뇌에 빠진다. 그들은 자기들의 시선을 고정시킬 근거지를 찾게 된다. 그들을 보편적인 세계에 연결시켜줄 신도, 왕도, 영주도, 이제는 없다. 개별자라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 즉 절대자를 포기할 수 없는 까닭에 신의 대체물을 선택한다.

208p 열정적인 사람은 허영심이 이 세계에 세워놓은 환상의 장벽을 보지 않으면서 통과한다. 그는 글자 그대로의 뜻에 개의치 않고 그 속에 담긴 정신으로 똑바로 나아간다. 그는 타인들에게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을 향해 걷는다. 그는 거짓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현실주의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약간 미치광이처럼 보인다.

296p 소설가의 진실은 총체적이다. 그것은 개인과 집단의 삶의 모든 양상을 포괄한다. 비록 소설이 어떤 양상을 소홀히 다룬다 하더라도 소설은 틀림없이 하나의 전망을 가리킨다.

302p 소스타인 베블런이 전개한 '현시소비'(conspicuous consumption)의 개념은 이미 세모꼴이다. 이 개념이 유물론의 이론에 치명타를 가한다. 소비된 대상의 가치는 오직 타인의 시선에 달려 있다. 타인의 욕망만이 욕망을 발생시킨다.

208p 단지 형편없는 작가와 천재작가만이 감히 이렇게 쓴다. "후작부인은 다섯 시에 외출하였다." 이러한 모욕적인 진부함 또는 지고의 대담성 앞에서 평범한 재능은 뒤로 물러선다.

384p 주인공은 진실에 도달하면서 죽는다. 그리고 자신을 창조한 작가에게 자신의 선견지명을 유산으로 남긴다.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칭호는 비극적인 결말에서 형이상학적 욕망을 이겨내고, 그리하여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인물에게 부여되어야 한다. 주인공과 그의 창조자는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분리되어 있다가 결말에서 서로 합쳐진다. 죽어가면서 주인공은 잃어버린 자신의 삶을 돌이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