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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문학공부센터

사르트르의 말

53p 내 속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갖는 짙은 추억도 즐거운 탈선도 없다. 나는 흙을 파 본 일도, 둥지를 훑어본 일도 없다. 식물 채집을 해 보지도, 새들에게 돌을 던져 보지도 않았다. 오직 책들만이 나의 새들이며 둥지며 가축이며 외양간이며 시골이었다. 할아버지의 서재는 거울 속에 사로잡힌 세계였다. 그것은 현실의 세계와 똑같은 무한한 부피와 다양성과 의외성을 지니고 있었다.

67p 세계는 내 발밑에 층층이 겹쳐 있었고, 모든 사물이 제각기 이름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사물에 이름을 붙여 준다는 것은 곧 사물을 창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 근원적인 환상이 없었던들 나는 결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101p 그러나 나로 말하자면, 지상의 어느 한정된 곳에서 시시각각으로 어떤 사람들 틈에 끼어 있고 거기서 자기의 존재가 군더더기임을 느끼는 것이 내 운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마치 물처럼, 빵처럼, 공기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다른 모든 곳에서 아쉬운 존재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154p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기쁨이 넘쳐흘러서 금방 펜을 놓았다. 속임수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말이 사물의 진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써 놓은 꼬불꼬불한 작은 글자가 도깨비불과 같은 빛을 잃고 차츰차츰 탁하고 단단한 물질처럼 굳어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나를 흥분시켰다. 그것은 허상의 실상화였다. 내가 호명만 하면 사자도 제2제정 시대의 대장도 또 사막 지대의 베두인도 어김없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글자와 한 몸이 되어 영원히 사로잡혀 있게 될 운명이었다. 나는 펜촉으로 긁적댐으로써 내 꿈을 이 세상에 단단히 붙잡아 매 놓았다고 생각했다.

166p 나는 글쓰기를 통해 다시 태어났다. 글을 쓰기 전에는 거울 놀이밖에는 없었다. 한데 최초의 소설을 쓰자마자 나는 한 어린애가 거울의 궁전 안으로 들어선 것을 알았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그런들 어떠랴, 나는 기쁨을 알았다. 공중의 노리개와 같던 어린애가 이제 자기 자신과 사적인 데이트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248p 20여 년 전의 어느 날 저녁, 자코메티는 이탈리 광장을 가로지르다가 자동차에 부딪쳐 쓰러졌다. 부상을 당하고 다리가 뒤틀린 그는 기절하는 것을 의식하면서 일종의 희열을 느꼈다. "드디어 내게도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나는 그의 극단주의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최악의 경우를 기다렸던 것이다. 다른 어떤 삶도 바라지 않을 만큼 사랑하던 그 삶이 우연의 어처구니없는 폭력으로 인하여 뒤집히고 어쩌면 꺾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 나는 조각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고, 살기 위해 태어난 것조차 아니었군. 나는 그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그를 흥분시킨 것은 위협적인 인과관계가 별안간 밝혀진 일이었고, 재앙처럼 사물을 석화시키는 시선으로 거리의 불빛이며 사람들이며 흙탕 속에 나자빠진 자신의 몸뚱이를 응시하는 일이었다. 조각가에게 광물계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나는 이렇듯 무엇이든 맞아들이려는 그 의지에 탄복했다. 놀라운 일들을 좋아하려면 그 정도까지 철저해야만 한다. 예술 애호가들에게, 대지는 그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드러내 보여 주는 그런 희귀한 벼락까지 좋아해야 한단 말이다.

252p 나는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한 그 존재가 타성적으로 보존되는 것도, 현재의 마음의 움직임이 과거의 움직임의 결과라는 것도 안정할 수 없었다. 미래의 기다림에서 탄생한 나는 눈부시게 온몸으로 비약했고, 순간순간이 나의 탄생이라는 예식의 반복이었다. 나는 내 마음의 작용을 톡톡 튀는 불꽃처럼 느끼고 싶었다. 어째서 과거가 나를 풍요하게 해 주었단 말인가? 과거가 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바로 나 자신이 나의 잿더미에서 소생하면서 부단히 다시 시작되는 창조를 통해서 나의 기억을 무(無)로부터 건져 낸 것이다.

272p 내 광기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이 첫날부터 나를 엘리트의 유혹에서 지켜 주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나의 순수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어느 누구의 위로 올라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 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