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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문학공부센터

정홍수의 소설의 고독

6p 만일 소설의 고독이란 게 있다면, 그건 소설을 쓰는 사람의 몫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소설이 마주하고 있는 세계 전체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소설을 읽고 소설에 대해 쓰는 일이 그 고독을 사이에 둔 도달불능의 도약이라면, 얼마든지 작품과 작가를 향해 뛰어들듯 '엎어질'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39p 삶이나 사랑이 많은 가능성 속에 열려 있다고 믿는 시간이 있다. 그때 사람들은 꿈이라는 걸 갖는다. 무용학원의 수상 축하 현수막에 걸려 있는 꿈들. 그러나 프리마돈나를 꿈꾸던 아이들은 도금이 벗겨진 조악한 메달을 간직한 채 대개는 장삼이사가 되어야 한다. 더 가혹하게는, "어쩌다 배신당하지 않고 그 꿈을 이루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루어진 꿈은 이미 빛을 잃은 채 일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들의 가슴에도 크든 작든 못 하나씩은 남아 있으리라. 역설적으로 '맹목'이 삶의 현실로 수긍되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86p 하고 보면 좋은 소설가란 일차적으로, 물의 기억을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와디(wadi, 마른 골짜기)에 발견적 진실에 이르는 이야기의 강을 현전시키는 사람이 아닐까.

146p 생을 걸고 하는 것에는 사랑도 자유를 위한 투쟁도 있지만, 문학도 있다. 찢기고 부서진 허깨비 같은 삶도 문학 속에서는 심연을 응시하는 심연의 힘으로 살아날 수 있다면, 여기서 삶에 대한 어떤 긍정에 이를 수는 없을 텐가.

162p 아마도 고독과 결핍이 오늘날만큼 사회적으로 철저히 관리되고 양식화되면서 한편으로는 현대생활의 보편적 조건으로 의식 속에서 허구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넘치는 풍요의 한켠에서 언제든 구제받을 수 있는 복지의 대상이 된 적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현대의 예술가라면 고독과 결핍, 광기와 탕진을 양식화하고 상투화하는 세계의 인력을 의식하면서, 세계의 허위를 꿰뚫는 부정성으로서 고독과 결핍의 순수한 형식을 새롭게 발견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21p 근대의 발명품인 소설은 아이러니를 통해 삶과 세계의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진실을 매번 처음처럼, 낯설게 드러내는 양식입니다. 이 경우 세계를 의미있는 것으로 구성해보려는 소설의 탐구는 늘 좌절하기 마련인데, 세계의 전면적 훼손이 이 탐구의 여로에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하기에 탐구의 진정성은 훼손될 수 없는 원칙입니다. 그 진정성의 열도와 밀도가 좌절과 배반의 진폭을 낳고, 그 진폭만큼 소설의 아이러니가 빚어내는 비애의 울림은 커지는 것이지요. 더 나은 삶과 세계, 살 만한 가치에 대한 그리움도 커갈 것입니다.

262p 20세기에도 그러했지만 새 천년에도 인간의 삶은 숭고하거나 순결하지 못할 것이다. 시궁창에 버려진 냄새나는 욕망들, 문학은 언제나 거기에서 시작한다. 문학은 인간학이되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인간학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