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p 사람들은 저마다 발각되기를 기다리는 가벼운 비밀을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사회를 대면하는 공적인 얼굴과 무덤까지 안고 갈 내밀한 의식 사이에 있는 미묘한 중간지대입니다. 결코 스스로 나서서 헤쳐 열어 보이지는 않지만, 적당한 때와 장소에 적당한 손길이 매듭에 닿으면 스르륵 열리는 보따리를 상상하면 비슷할 것 같습니다.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인물일수록 이 중간지대는 풍요롭게 우거져 있습니다. 인터뷰는 깊숙한 심리상담도 엄정한 취조도 아닙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침범'하지 않은 채, 그를 이해하는 데에 요긴한 구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니까 서툴러도 갈 수밖에 없는 길이었다고 하면 변명이 될까요? 인터뷰라고 하면 저는, 상대방의 정원 한구석에 앉아 울타리 밖과 집안을 번갈아 넘겨다보며 주인의 성격을 짐작하는 광경이 떠오릅니다. 밖으로 내쳐질까봐 불안한 한편, 갑자기 실내로 초대하면 어떻하나 지레 조마조마하기도 한 거죠. (웃음)
이 중 내가 주의깊게 읽고 반하게 된 이들,
- 세계의 끝, 소설가_김연수
21p 산문과 소설을, 가볍게 쓰는 글과 힘주어 쓰는 글을 뚜렷이 구분하는 태도가 보입니다. 소설에 대해서는 각별히 경건한 것 같습니다.
천재의 소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진짜 훌륭한 소설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늘 그와 비슷한 소설을 추구하지만 항상 실패하죠. 그리고 다음에는 더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에세이는 평상시의 자아로 쓰는 글인데, 소설을 쓸 때는 개인으로서 쓴 적이 없어요. 오랜 시간에 걸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있어요. 무슨 말이냐면,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는 저보다 인생 전반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이야기를 해석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 책도 많이 보고 기술적인 것도 배우고 경험도 하죠. 그대로의 저는 제가 쓰고자 하는 소설을 쓸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제 자신이 점점 소설 쓰는 자아로 변했고 제가 나아지고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는 거의 간증을 할 수도 있어요. (웃음)
-마이크를 든 슈퍼맨_김제동
44p 방송 출연 초기인 2003년 무렵 기사를 보면 방송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자신은 엄연히 MC라는 강한 정체성과 자부심을 피력했습니다. 이 직업 안에서 어떤 경건함을 발견한 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때 레크레이션 강사를 겜돌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200명 정도가 모인 한 신입생 환영회 사회를 보러 갔는데 과대표가 “오늘의 겜돌이를 소개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안 나갔습니다. 당황한 과대표에게 겜돌이 찾아오시라, 난 사회자로 왔다고 했어요. 오늘의 사회자를 소개하겠다고 말을 고쳤습니다. 그래도 안 나갔습니다. 기싸움이었죠. ‘사회사’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썰렁한 분위기 속에 마침내 올라가서 사과를 드리고 “지금부터 제가 겜돌이와 사회사의 차이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휘몰아쳤습니다. 몇명은 웃다가 토했습니다. (좌중 폭소) “아, 제발! 그만!” 비명도 지르고요. 한 시간 예정 행사를 두 시간 반 하고 나서 말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어떤 직업을 갖든 그 직업이 어떻게 불릴까는 여러분들이 결정합니다. 어떤 직업도 비하마시고 여러분이 재단하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소명을 갖고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하고 큰절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물론 과대표가 저를 모욕하려고 그러지 않았다는 걸 알죠. ‘사회사’란 말이 무리란 것도 압니다. 레크리에이션 강사 시절 대구 법원 앞에 즐비한 변호사 사무실을 후배들과 보면서 내가 반드시 저기 ‘사회사 김제동 사무실’을 내고 만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죄를 변호하고 구제하는 것도 위대하지만 우린 천명, 만명을 웃기는 사람들인데 저 정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무당의 작두, 택시 기사의 운전대, 설거지하는 어머니의 수세미 안에는 다 신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마이크를 잡으면 다 사회자입니다. 동네 이장님들이 가장 훌륭한 사회자입니다. 청중을 속속들이 알고 그분들이 알아듣는 적확한 단어와 명확한 정서로 말하는 것이 훌륭한 사회자 아닙니까.
-재미의 은하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_<무한도전>김태호PD
74p 영화적인 기획들과 비인기 종목에 장시간에 걸쳐 도전하는 특집을 보면 더이상 “얼마나 웃기느냐”가 더이상 <무한도전>의 절대적 척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웃음이 가장 크긴 하지만 포괄적 재미를 추구해요. 만약 스릴이 시청자에게 충분한 쾌감을 준다면 웃음보다 스릴을 좇아갈 수도 있고 공익적 내용이 공감을 끌어낸다면 그 부분을 살릴 수도 있어요. 어차피 개그맨들이기 때문에 웃음은 자연히 들어가요. 전체적으로 저희 멤버나 시청자도 시즌1, 2 때처럼 넘어지는 몸개그가 자아내는 웃음만을 재미로 여기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아요. 최근 들어 제작진이 바빠진 것은 어느 정도 성장을 마친 캐릭터들을 한꺼번에 다른 환경에 넣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죠. 이번주에 눈떠보면 다른 환경에 처해 있고 다음주는 또 다른 세계죠. 과거 <무한도전>이 집에서 성장하는 과정이었다면 이젠 로드무비처럼 역에 멈출 때마다 다른 상황에 맞닥뜨리는 거죠. 가다가 기차가 고장날 수도 있고 그러면 정비를 해서 가야 하고 기관사가 바뀔 수도 있어요.
-아이처럼, 사제처럼_영화평론가&영화감독 정성일
118p 언제가 사석에서 영화의 완성도보다 영화에 깔려 있는 창작자의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용기가 영화의 좋음을 보장하는지 여쭤봤고요.
=왜냐하면 영화는 다큐멘터리조차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의 가능성이니까요. 그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영화의 태도란 세상의 가능성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죠. 너무도 흔한 파스칼의 말. 사람은 연한 갈대이지만 연한 갈대가 의미있는 까닭은 단 하나, 인간이란 존재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해서입니다. 영화가 가치가 있다면 오로지 세상의 가능성에 대해 포기하지 않고 우리가 그것을 통해 더 나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니냐는 거죠.
-그 말씀은 예를 들어 세상과 끝까지 싸우겠다거나 구원을 말하는 서사를 가진 영화만 훌륭하다는 뜻은 아닐 텐데요.
=서사가 보고 싶었다면 문학에 사랑을 바쳤을 거예요. 또한 영화의 시간은 서사를 하기에 충분치 않아요. 서사에 매달리는 순간 영화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바쳐야 하고 그런 영화들은 대개 빈곤해지죠. 제가 영화에서 보고 싶은 것은 시네마틱 센스(cinematic sense)입니다. 뜻(meaning)이 아니라 센스(sense), 감각과 의미를 동시에 지칭하는 말이죠. 영화가 찍을 수 있는 건 세상의 표면뿐이므로 그 표면을 시네마가 어떻게 건드리느냐는 결국 ‘태도’의 문제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태도와 센스를 묻는 것이 영화의 서사를 묻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한국 문학의 사려깊은 연인_문학평론가 신형철
147p 평론이 독서만으로 얻을 수 없는 무엇을 주었나요?
=저에게는 시나 소설이 가진 불투명한 메시지와 아름다움을 삶으로 빨리 전환시키고 싶은 욕구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작품으로부터 뭔가를 빼와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에 관해 명제화하고 싶었나봐요. 평론이 그런 부분을 제공해줄 때 짜릿함을 느꼈고요. 예술을 풍성한 명제로 바꾸는 작업에 끌렸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지닌 힘을 훌륭한 평론가들의 글에서 발견했던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_지식소매상 유시민
176p 정치에서 스타란 무엇을 의미하나요?
=스타 정치인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사람이죠. 여기서 호랑이는 대중의 열망이에요. 한번 올라타면 놓고 떨어지든가 죽기 살기로 매달려서 끝까지 가든가 둘 중에 하나예요. 위험하죠. 위험을 벗어나고 싶으면 지지자를 실망시키더라도 빨리 손을 털고 그만두든가 정치를 하는 한은 중간에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더라도 끝까지 가는 것이요. 야수랑 싸우다가 야수가 되는 수도 있죠. 야수와 싸울지라도 성인의 고결함을 견지해야만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어요. 그러면 국민들이 알아봅니다.
-뜨거운 심장, 본능적 엇박_배우 류승범
237p 그나저나 박치라는 말씀은 정말 의외입니다. 류승범씨의 대사, 액션, DJ 활동에 공통된 요소는 리듬감이라고 생각해왔거든요.
=흑인의 리듬감은 리듬감이라고 안 하고 그루브(groove)라고 해요. 얘들은 백인의 그것과 달리 리듬이 엇박인데 일종의 박치인 거죠. 흑인음악을 들어보면 “딱 딱” 이 아니라 “딱 따닥 딱딱” 하는 마치 한국의 장단 같은 박자예요. 제게도 엇박의 리듬감은 있는 것 같아요. 딱 떨어지는 리듬감을 지닌 사람과 달리 전체적인 삶의 태도나 방식도 조금씩 어긋나 있고.
-취한 말들의 시간_시인 김경주
262p서정이 무엇이냐는 건 토론이 필요한 문제지만, 일부러 자기 안에 존재하는 것을 도려내는 것도 부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열패감일 수도 있는데, 저는 근본적으로 시를 쓰는 자는 소임이 있다고 봐요. 시가 감염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는 거죠. 서정이 지닌 폭력성이 있어요. 보수가 정권을 잡으면 서정이 옹호를 받아요. 난해한 것을 꺼리고 온기를 찾죠. 그것이 반성없이 기조로 형성되면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시는 모든 언어예술의 최전방에 항상 서 있어야 해요. 모국어가 썩지 않게끔 고유성을 찾아내야 해요. 시가 제도화, 평면화되면 그 순간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한 나라의 문화를 평가할 때 시인이 얼마나 있느냐는 중요한 척도죠.
268p 항상 죽은 손목시계를 차고 여행한다고 책에 썼습니다. ‘츄리닝 바람’ 작업실의 벽시계도 멈춰 있던데요. 아예 시계를 차지 않는 쪽이 아니라 죽은 시계를 굳이 차고 가는 까닭이 뭔가요?
=시계를 차고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시간에 맞춰서 살게 돼요. 그 속도감을 없애고 싶었어요. 죽은 시계는 계속 뭔가를 환기하고 갈등을 일으키죠. 갑갑해서 가끔은 맞추고도 싶고, 몰래 돌려보기도 하겠죠. 죽은 시계는 문학의 이미지예요. 비유하면 시계를 아예 차지 않고 가는 것은 예술이 뭔지는 알지만 예술을 하지 않는 사람이고, 죽은 시계를 구태여 차고 여행가는 사람은 끊임없이 환기하고 갈등하며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바람이 그대를 데려다 주리라_배우 고현정
358p 2004년 연기자로 복귀한 이후 공연한 후배들이 인사치레일지 몰라도 공히 “고현정 선배가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셨다”는 이야기를 했더군요. 배우가 다른 배우를 돕는다는 게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그 친구들에게 스스로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대개 사람들은 일터와 전선에 나가면 약점을 일단 가리고 보잖아요? 저는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다 까라. 감추는 데에 에너지를 쓰다가 놓치는 것도 많고 이 직업이 감추려는 의도 자체를 다 들키는 일이다. 그러느니 다 까고 도움을 받아라. 네가 생각하는 약점이 파란색이야? 그럼 파란색을 너의 온몸에 칠해봐. 그러고 나면 뭘 할 수 있을까?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한국에서 연기생활 하는 구조 자체가 약점을 숨기다보면 얻는 것도 없거든요. 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너 혹시 알고 보니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니? 나도 그런 거 있었거든. 똑똑해지고 싶으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하긴 싫지? 그렇지만 살짝살짝 “저 사람 의외인데?” 하는 반응을 얻고 싶은 거지? 그러려면 이렇게 저렇게 하면 돼. 근데 너 그게 굉장히 시시한 일이라는 건 알지? 그런 이야기요. 배우들이 그렇게 시시하고 약한 데가 있어요. (웃음)
-과학이 인문학을 만났을 때_물리학자 정재승
402p 편집자적 감각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 한 주제에 관해 길이가 다른 글을 썼는데, 각각 구조가 완결된 글이었다는 평도 들었고요. 1.5매를 줄여달라고 부탁하면 정확히 줄이면서 어디를 삭제했는지 짚어내기 어렵다는 편집자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치는 글을 쓰고 싶은 게 핵심이에요. 읽고 난 사람들이 “어, 그렇구나” 하는 게 아니라 “오, 그렇구나!”라고 탄성을 내는 글을 쓰고 싶어요. 중요하게 여기는 건 적절한 인용과 비유, 예제예요. 가령 뇌에 관한 글을 쓰고 싶으면 저는 서가에서 영문학에 관한 책을 꺼내 제가 밑줄 그은 구절이 무엇인지 뒤적거려보는 일로 시작을 해요. 과학에 대한 글은 대부분 가슴에 와닿지 않기 때문에 적절한 인용과 비유, 예제 없이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거든요. 숫자는 몇 킬로미터라고 쓰기보다 이것이 지구를 몇번 감을 수 있는 길이라고 쓰죠.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읽을 수 있도록, 스무번쯤 소리내어 읽으면서 다듬어요. 산문도 운율이 있거든요. 다시 읽는다 해도 읽다가 멈추고 되돌아가서 곱씹는 게 아니라 한번 죽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죽 읽는 방식으로 곱씹는 글이 되도록 신경을 씁니다.
403p 교수님의 책을 읽으며 과학이 발견하는 원리를 두고 그 자체로 희망적이거나 절망적이라고 말하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동물의 생태 연구는 성역할의 고정관념이나 인간의 종 우월주의를 깬다는 점에서 희망적이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설명한 파레토의 법칙은 불평등이 자연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과학이 드러내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에 관한 사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냐 그렇지 않느냐, 혹은 희망을 주느냐 절망을 주느냐는 그 자체의 속성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저 그것을 희망적으로 또는 절망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우리 안에 있겠죠. 오늘은 굉장히 희망적인 자연의 메시지가 30년 뒤에는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다윈의 진화론에 나오는 적자생존도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죠. 하지만 그 현상이 드러났다고 해서 다윈을 지지하는 사람이 좌파냐 우파냐, 그것이 암시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태도가 적절하냐 그렇지 않으냐는 문제는 시대마다 달라질 수 있다고 봐요. 자연은, 사사로운 인간의 감정에 연연하지 않고 굉장히 냉정한 방식으로 자기 고집대로 운영돼요. 또 그런 냉정함 때문에 오래 버틸 수 있고, 알고 싶은 욕망이 더욱 꿈틀거리는 거죠. 해석은 자기 가치관과 시대에 맞게 하면 돼요. 자연이 이러니까 우리도 그러자고 할 수도 있고, 자연은 이렇지만 우리는 그러지 말자는 두 논리가 모두 가능해요. 그래서 과학이 과학만으로 홀로 설 수 없고 다른 사회적 실체와 결합할 수밖에 없어요.
-시간을 조각하는 손_음악가 장한나
450p한나씨가 지휘를 시작한 이유는 언론에 설명한 바에 따르면 두 가지 정도로 정리됩니다. 첫째는 음악가로서 자신이 누린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은데 그 길은 청소년에게 클래식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케스트라라는 악기가 필수적이라는 설명이죠. 둘째는 첼로 레퍼토리 한계도 있지만 큰 음악가가 되기 위해 넓게 파는 길을 택했다는 이야기고요. 둘 중 어느 쪽이 먼저, 혹은 더 비중이 큰 동기인가요?
=두 가지 다 같은 무게였어요. 어쩌다 보니 거의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아직 해보지는 않았지만 제가 앞으로 50년 더 첼로를 한다면 알면 알수록 점점 현미경으로 디테일을 보는 일밖에 안 남아요. 시야가 좁아지는 위험이 있죠. 또 음악은 스스로 새로운 열정을 갖지 않으면 매너리즘에 빠져요. 그래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연주가 똑같은 음악인들이 있는 거죠. 이야기 나눠보면 그 자신도 알아요. 재미없다고, 하기 싫다고 해요. 그런데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는 거죠. 어렸을 때부터 한 게 그것뿐이니까.
본인도 그런 위험에서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당연하죠. 아무도 예외가 아니죠. 최대 과제는 스스로의 음악성을 성장시키는 것인데 그럼 어떻게? 저는 도전을 할 때 가장 많이 성장을 하는 유형이에요. 여태 접한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 훨씬 복잡한 것, 훨씬 긴 것, 뭐가 됐건 다르고 새로운 것을 하고 나면 많이 커요. 그런데 지휘를 몇 차례 해보고 나니까 엄청나게 재미있어요. 성격에 맞고 하고 싶어했는데 보람까지 있으면 그것이 뭐든 중독되는 것 같아요. 지휘는 어려서 하다 1등 하는 바람에 계속 하게 된 일이 아니라, 성년이 된 뒤 의식적으로 날 위해 선택한 일이기도 하고요.
이-중에서도 딱 한 명을 고르라고 하면,
별 관심 없다가 단숨에 팬이 되게 만든
김제동을 꼽아 본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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