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p 타국에서 발생한 재앙을 구경하는 것은 지난 1세기하고도 반세기 동안 (오늘날의)언론인과 같다고 알려진 전문적인 직업여행자들이 촘촘히 쌓아올린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경험이다.
48p 사진에는 두 가지 모순된 특징을 하나로 묶어 준다는 장점이 있었다. 사진은 애초부터 객관적이라는 공인을 받아 왔다. 그렇지만 사진은 언제나 특정한 시점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카메라가 기록을 하는 기계였기 때문에, 사진은 현실의 기록이었다(제 아무리 부분적일지라도, 말로 된 설명과는 달리 이 점에는 논박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사진은 현실을 증명해 준다. 사진에 찍힌 누군가는 틀림없이 그곳에 존재했던 인물인 것이다.
울프의 주장에 따르면, 사진은 "논쟁이 아니면, 눈에 보이는 사실의 조잡한 진술일 뿐"이다. 그러나 사실상 사진은 '그저'그 무엇일 뿐인 것이 아니며, 울프나 그밖에 어떤 사람일지라도 사진을 일종의 사실로 여길 수는 없다. 울프도 곧바로 덧붙였듯이 "눈은 뇌와, 뇌는 신경 체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신경 체계는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느낌을 모두 통해서 순식간에 메시지를 보낸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재빠른 재주를 갖춘 덕택에 사진은 객관적인 기록인 동시에 개인적인 고백이 될 수 있으며, 실제 현실의 특정한 순간을 담은 믿을 만한 복사본이자 필사본인 동시에 그 현실에 관한 해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뛰어난 문학이 그처럼 되기를 갈망했으나, 문학적인 의미에서 결코 성취해 내지 못했던 그런 경지이다.
110p 이런 사진들이 보여주는 광경에는 이중의 메시지가 있다. 이 사진들은 잔악하고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 곳곳에 존재하는 이런 사진들, 이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간단히 말해서 가난한 나라들)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125p 때때로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훨씬 더 잘'보게 되며, 혹은 적어도 그렇게 느끼게 된다. 실제로, 보통보다 사물을 더 잘 보이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사진의 주요 기능들 중 하나이다(그래서 사람들은 실물보다 좋게 보이지 않는 사진에 늘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뭔가를 미화하는 것은 카메라의 전통적인 기능으로서, 이런 기능은 보여진 것에 대한 사람들의 도덕적 반응을 하얗게 표백해 버린다. 뭔가를 최악의 상태로 보여줘 그것을 추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좀더 근래에 등장한 기능이다. 사람들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싶어하는 이런 기능은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뭔가를 고발하고, 가능하다면 사람들의 행동까지 변화시키려는 사진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131p 모든 기억은 개인적이며 재현될 수도 없다. 기억이란 것은 그 기억을 갖고 있는 개개의 사람이 죽으면 함께 죽는다. 우리가 집단적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기하기가 아니라 일종의 약정이다. 즉,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이것은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라고 우리의 정신 속에 꼭꼭 챙겨두는 것이다.
154p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167p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207p 문학의 임무 중 하나는 문제를 명확히 제기하고, 널리 만연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겁니다. 그리고 뭔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조차도 예술은 자연스럽게 반대쪽으로 나아갑니다. 문학은 대화이자 응답입니다. 문화가 발달하고 각 문화가 상호 작용함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것과 죽어 가는 것을 향해 인간이 보여준 반응의 역사가 곧 문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작가는 이렇듯 우리가 분리되어 있으며 서로 다르다고 말하는 상투어구들과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작가는 신화의 전달자이기도 하지만 제작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신화뿐만 아니라 반反신화도 제공해 줍니다. 삶이 반反경험, 즉 당신이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경험을 제공해 주듯이 말이죠.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작가는 이 세계에 눈길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떤 사악함을 저지를 수 있는지 이해하고 살펴보며 연상해 보려고 노력하는 존재, 그렇지만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냉소적이 되거나 천박해지거나 타락하지는 않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문학은 이 세계가 어떠한지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습니다.
문학은 언어와 서사를 통해서 기준을 제시하고 깊은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문학은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고, 발휘하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 아닌 다른 사람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에 감응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자신을 잊을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뭔가를 배울 능력이 없다면, 용서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인간이 아닌 뭔가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214p 문학, 그것도 세계 문학에 다가간다는 것은 국가적 허영심, 속물 근성, 강제적인 편협성, 어리석은 교육, 불완전한 운명, 불운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은 광활한 현실로, 즉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었습니다.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특히 독서와 내면의 가치가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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