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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독서/한 권의 책

김용석의 철학 정원


 나는 이런 평론글이 그렇게 좋더라~.~

63p 원죄 의식과 그 설정은 모든 이야기에 극적인 효과를 몰고 온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 시작하는 유일신-조물주의 관점에서 본 인류의 역사에서도 그렇고, 부친을 살해할 수 있다는 신탁이 부여한 원죄를 짊어지고 비극적 상황에 쫓기는 신화의 주인공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에서도 그렇다.

 원죄 의식은 '손상된 주체'를 설정한다. 완벽한 주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손상된 주체는 세상일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가 맺는 모든 관계, 그가 다루는 모든 사물에 대해 다각도로 깊이 생각해서 행동해야 한다. 그렇게 하더라도 종종 일이 꼬이게 마련이다. 즉 사건이 터진다. 손상된 주체는 결국 '사건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과 결말 그리고 성공 또는 실패와 후회의 서사로 이어진다.
('원죄 의식'은 삶을 역동적으로 만들까? - 케스트너 [에밀과 탐정들])

88p 그리스 비극에서뿐만 아니라 현대 문학작품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나약함, 실존의 부조리, 두려움, 연민, 모순 등이 비극적 사건을 이루는 요소들이지만, 무엇보다도 인간 비극성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어로 '아나그노리시스anagnorisis', 곧 인간 자신이 스스로 비극적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들의 '비열함'과 숙명의 무자비함에 대항하여 역설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존재 의미와 자기 행위의 가치를 정당화하는 방법이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비극을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 자체로 비극으로부터 해방될 가능성, 곧 정화와 구원의 양식을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본다. 인간 존재는 비극적 모순과 좌절,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과정에서 존재는 상실되는 게 아니라, 결정적으로 확인된다. 비극은 단순히 슬프고 절망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근원적이고 포괄적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기회이다. 라이오스는 비극을 예언하는 신탁에 절망해서 삶을 근원적이고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합리적 비극'은 가능한가?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114p 이 비극은, 인간이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인간 스스로 불변의 구조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일러준다. 곧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삶의 조건들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쳐준다. 인위적 조건들이 절대화될 때,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표출은 그 조건들과 갈등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결국 비극은 탄생한다.
(운명인가, 인간이 놓은 덫인가? -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130p 이름도 없이 홀로 남은 괴물은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된 존재'가 된다. 아무도 그를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은 존재 자체가 부정될 가능성을 의미한다. 창조 신화에서도 조물주는 자신의 피조물에 이름을 지어주어 그 존재를 확인한다. 아담과 이브도 그렇게 탄생했고, 그들 역시 에덴 동산의 다른 생명체에 이름을 짓는 것으로 삶을 시작한다.
 작명은 아무렇게나 부르지 않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일이다. 내게 이름이 있다는 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제약한다. 그것은 '나를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알리는 일이며, 곧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탄생한 뒤 이름이 없다는 건 비극의 시작이다.
 왜 그런가? 비극의 본질은 결국 운명이 나를 함부로 대하고 말았구나 하고 인식하는 데 있다. 이름이 없다는 건 이미 이 세상이 나를 함부로 대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일이다. 빅토르의 피조물은 타인들이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름 없음'에서 탄생하는 비극 -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171p 악과 선이 투쟁할 때 악은 선에 대해 항상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 악은 자기 본질에 충실하면 그만이지만(곧 일관되게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악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선은 악에 대해서도 선해야 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어둠과 밝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어둠은 자신 안으로 침잠할수록 더욱 어두워질 수 있지만, 밝음은 어둠조차도 밝혀야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다. 곧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를 충족시킬 수 있다.
 이것은 삶과 죽음, 열림과 닫힘처럼 우리가 동등한 대립관계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들에도 해당된다. 닫힘은 열림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다. 닫는다는 행위가 열림을 원천적으로 배제해도 자기 모순이 없다. 그러나 열림은 닫힘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거나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 여는 행위는 닫음의 행위에도 열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그것으로 자기 종결을 이루지만, 삶은 죽음에조차도 생명을 불어넣어야  삶의 의미를 완성한다. 그래서 죽음에서 생명의 부활을 시도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죽음은 그 자체로 동어반복적이고 모든 의미를 삭제하지만, 영원한 생명은 대단한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악에게 무엇을 담보 잡힐 것인가? - 루커스 <스타 워즈>)

215p 나는 언젠가 인간이 우주에서 인간보다 더 탁월한 존재와 조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인간을 더 잘 알기 위해서도, 인간이 변화하기 위해서도 '좋은 일'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인류가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타자가 필요하다. 그 타자는 적어도 인간만큼 지적 능력을 갖춘 존재여야 한다. 아니, 인간보다 지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더 뛰어나다면 인간이 자신을 반성하고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인간은 바뀌어야 한다. 자신이 바꾸어놓은 지구라는 삶의 터전에 대해 보은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지적 생명체의 진실을 찾아서 - 큐브릭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275p 읽기는 쓰기의 의욕을 불러일으키지만, 쓰기는 읽기를 증가시킨다. 글쓰기를 통해 자아를 실험하고, 자아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항상 다시 찾아보고 싶은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몽테뉴가 그러했듯이 책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친구이다. 이 부담 없는 재회가 책과 맺은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며, 그 우정이 다시금 우리에게 보석 같은 혜택을 준다.
 한편 글쓰기는, 몽테뉴의 경우처럼 자신의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고 사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글쓰기는 타인에게 자기를 노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은 어떤 형태로든 '자기 노출의 창'이다. 그 창을 통해-몽테뉴의 저작에서도 드러나듯이-아주 개인적인 것도 타인들의 읽기에 노출된다. 글쓰기는 노출의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더욱 치열하게 자아 성찰을 거치게 된다. 바로 여기에 읽기와 쓰기의 철학적 의미가 있다.
 독서는 자아를 성숙시키는 길이지만, 자기 노출이라는 글쓰기의 실험에 이를 때 타자의 존재와 시선을 온몸으로 대면하면서 그 여정을 완성한다. 이와 동시에 타자의 시선이 있는 한, 타자성에 대한 성찰 또한 따라오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글을 쓰는 동안 '다른 존재들'을 사유하게 된다. 이것은 읽기와 쓰기의 철학이 던지는 또 하나의 화두다.
('읽기와 쓰기의 철학'에 대하여 - 몽테뉴 [수상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