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p 미디어는 인간의 모든 욕망을 낱낱이 드러내어 욕망의 포를 뜨고 살을 발라낼 작정인 듯하다. 시청자는 마치 그것이 처음부터 스스로의 욕망이었던 것처럼 욕망이 흉측하게 드러난 타인의 고통 퍼레이드를 관음증 환자처럼 탐닉한다. 바야흐로 극단의 시대, 과잉의 시대다. 욕망의 극단을 추구하고, 감정을 과잉으로 몰아가는 미디어의 유혹술에서 핵심적 미끼는 에로스와 자본이다. 인간의 욕망을 가장 투명하게 폭로하는 기제가 바로 불륜과 화폐이기 때문이다.
48p 연암 박지원은 아이들만의 매력을 유한준에게 보내는 편지 중 한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마을의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읽기에 싫증을 내는 것을 꾸짖으니, 하는 말인즉 '저 하늘을 보면 푸르기 짝이 없는데, 天자는 푸르지가 않잖아요. 그래서 읽기가 싫어요.' 이 아이의 총명이 창힐을 굶겨 죽입니다." 하늘은 분명히 푸른데 하늘 天이라는 글자는 푸르지가 않다는 것. 눈에 보이는 하늘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생한 역동성이라면, 변하지 않는 글자 天은 추상화된 지식, 규범화된 정보일 것이다. 이 아이의 대담무쌍한 솔직함에서 연암이 이끌어내는 메시지 또한 장쾌하다. 하늘의 푸름을 담지 못하는 天의 비좁음을 알아차리는 아이의 총명함이, 먼 옛날 문자를 발명한 중국의 전설적인 성인 창힐의 권위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아이의 총명함이 어른을 굶겨 죽이는 통쾌함은 이렇듯 어른의 비밀에 무심한 아이와 아이의 총명함을 껴안는 어른 사이의 따뜻한 네트워크에서 가능해지는 것은 아닐까. 물론 아이들은 예전보다 훨씬 똑똑하고 눈치 빠르고 민첩해졌다. 그러나 '미디어'를 태반으로 삼아 TV와 컴퓨터 게임과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친구로 삼은 오늘의 아이들은, 과연 18세기 서당에서 농땡이를 치던 저 연암 시절의 아이들보다 행복해졌을까.
53p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자유로워졌다. 조금 '위험한'책을 읽는다고 해서 검열을 받아 체포되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 배낭여행을 떠날 수 있으며, 조국의 눈치를 보며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우리의 20대들은 과연 그때보다 행복해졌을까. 자본과 문명이 약속한 장밋빛 미래는 혹시 인터넷 게임이나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거대한 판타지는 아니었을까. 우리는 미디어의 판타지를 '보기만'하면서 실제로 '누리는'듯한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해방된 조국에서 얼마든지 신나게 연애하며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인터넷 화면 안에 둥지를 튼 연예인 관련 뉴스나 주가 폭락 소식에 하루 종일 붙들려 있는 오늘의 삶은 왜 이리 갑갑할까. 청춘의 근거는 나이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하여 운명과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99p 아직 나 역시 속독의 유혹, 다독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경험으로부터 얻은 유일한 진실은 나에게 좋은 책일수록 속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진정 아름다운 작품은 요약 불가능하다는 것, 요약형 지식과 축약형 정보는 우리의 삶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 또한 평범한 진실이지만, 화려한 유비쿼터스 시대에 잊기 쉬운 진실이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빨리 읽히는 책'을 거부하게 되었다. 우리는 남의 글은 빨리 읽기를 바라고 자신의 글은 천천히 읽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진정한 타인을 만나는 길은 '소통 불가능한 타인의 사유의 문(門)'을 향해 지치지 않고 노크하는 길밖에는 없는 듯하다. 그래서 내가 택한 길은 미련하게, 답답하게 한 권의 책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다. 내가 사랑한 책들은 나의 지저분한 메모로 가득 차서 '행간'이 거의 지워질 듯 너덜너덜해졌다. 내 책에 묻은 손때와 지저분한 메모들이야말로 대답 없는 타자를 향한 나의 지독한 외사랑의 방식이다. 아직 내 사랑의 방식은 이렇게 남루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꾀죄죄한'사랑의 방식이 속독과 다독을 향한 내 오랜 강박을 치유해 주었다는 점이다. 지식의 분량을, 똑똑한 사람의 '분위기'를 사랑했던 내가, 이제는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18p 일찍이 폴 오스터는 책과 독자 사이의 일 대 일의 관계를 <월드가이드>와의 인터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 적 있다. "'문학'이 가진 흥미로운 점 하나는, 예를 들어 영화와 비교했을 때, 언제나 단 한 사람이 단 한 권의 책과 조우한다는 것이죠. 즉 항상 일 대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 작가이고, 당신이 그 독자이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어느 한 페이지 위에서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그곳이, 내 생각에는 인간의 의식들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친밀하고 은밀한 장소입니다. 자신이 모르는 이방인의 의식 속으로 잠입해 우리 인간의 공통적 휴머니티를 발견하는 순간은 오로지 그때뿐입니다. 그래서 문학은 절대로 죽을 수 없는 것이죠." 폴 오스터가 말하는 '문학'을 '책'으로 바꾸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독서는 저자와 독자, 아니 '나'와 '책'이 독대하는,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밀월여행이다.
125p 상상력이 뜻하지 않게 유머를 낳을 수는 있지만, 유머가 상상력을 낳을 수는 없다. 그 어떤 마음의 파문도 일으키지 않는 말초적 유머는 가독성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유머의 첫맛과 뒷맛이 일치하는 유머는 독자의 상상력을 간질이지 못한다. 복잡 미묘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 짠하고도 애잔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는 언제나 감동의 원천기술이다(그래서 나는 아직도 박완서의 걸쭉하고도 새침한 구식 유머가 좋다). 문학의 유머는 <개그콘서트>나 <웃음을 찾는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세상의 모든 역사와 세상의 모든 억압과 경쟁한다. 문학적 유머의 원천기술은 의미를 삭제한 쾌락이 아니라, 의미와 질펀하게 놀아나는 예술과 지성과 상상력의 비빔밥이다.
131p 오르한 파묵의 작품세계는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다채로운 화답의 콜라주로 압축될 수 있다. 푸코는 어떤 인터뷰에서 난데없이 짜증을 부린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등으로 나에게 질문하지 말아주십시오. 언제나 똑같은 채로 있으라는 식으로 질문하지 말아달란 말입니다." 오르한 파묵 역시 이렇게 호소한다. "부디 내게 서양인이 되라, 동양인이 되라 주문하지 말라." 그것은 "나는,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아'와 '적'을 가르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며, "Who are you?" 라는 질문 자체에 녹아 있는 정치적인 폭력성을 겨냥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얀 성]의 주인공 '나'는 나를 나이게 하는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를 꿈꾼다. 나를 평생 동안 '나답게'만 살아달라 주문하는 정체성의 그물이야말로 폭력이며, 모두이면서도 그 누구도 아닐 수 있는 자유야말로 작가의 생명일 것이다.
188p 미국은 정말로 인류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들이 타인의 고통에 개입하는 방식은 미국 드라마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과학수사대처럼 왜 늘 '사후적'인 것일까. 그들은 왜 모든 사건이 일어난 후에, 범죄나 재난이 이미 일상을 파괴한 후에 나타나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는 것일까. 진정 훌륭한 경찰이라면 '일상'에서 더 이상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개입하고 예방하는 프로그램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미국 드라마의 경찰들은 위대한 해결사의 역할을 자임하지만, 그드르이 모든 대단한 개입은 항상 '사후'에 이루어진다. <CSI>의 모든 첫 장면은 '이미'살해된 시체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사건이 일어난 후 현장에 나타나 그들의 권력을 행사하고 확인하는 퍼포먼스를 실현한다. 진정한 권력은 자신의 권력을 재확인할 필요가 없다. 진정한 권력이 있다면 범죄를 해결함으로써, 아니 범인을 색출해냄으로써 자신의 권력이 건재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 자체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노력을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빈곤과의 싸움이고 질병과의 싸움이며 모든 차별과 고통과의 싸움일 것이다.
194p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이 가장 많이 토로하는 고민 중 하나가 '과연 나에게 재능이 있을까'하는 의혹이다. 우리의 예술 교육은 군계일학의 천재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알록달록한 재능을 가진 수많은 아이들의 기를 죽여온 것은 아닐까. 나 또한 예술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의 배타적 영역이라는 선입견에서 오랫동안 벗어나기 어려웠다. 문학을 사랑했지만 '감히'작가의 꿈을 꿔보지 못한 이유도 '내게는 재능이 없다'는 절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수업을 함께하는 학생들에게 '감히'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재능은 광에서 곶감 꺼내먹듯 정해진 분량을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고. 재능은 뜻밖의 타인과의 부딪힘을 통해, 알 수 없는 세계와의 충돌을 통해, 감당할 수 없는 사건과의 조우를 통해 매일매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제련되고 폭발하고 잉태되는 것이라고. 재능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 무구한 집중에서, 낯설고 어이없는 타인을 만나 그를 미치게 사랑하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나 아닌 나'를 향해 질주하는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재능을 발견하지 않으려는 아집과 태만에 있는 것이지 재능의 유무 자체가 아니라고. 누구도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발견하는 재능을 가질 순 없는 것이 아닐까.
48p 연암 박지원은 아이들만의 매력을 유한준에게 보내는 편지 중 한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마을의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읽기에 싫증을 내는 것을 꾸짖으니, 하는 말인즉 '저 하늘을 보면 푸르기 짝이 없는데, 天자는 푸르지가 않잖아요. 그래서 읽기가 싫어요.' 이 아이의 총명이 창힐을 굶겨 죽입니다." 하늘은 분명히 푸른데 하늘 天이라는 글자는 푸르지가 않다는 것. 눈에 보이는 하늘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생한 역동성이라면, 변하지 않는 글자 天은 추상화된 지식, 규범화된 정보일 것이다. 이 아이의 대담무쌍한 솔직함에서 연암이 이끌어내는 메시지 또한 장쾌하다. 하늘의 푸름을 담지 못하는 天의 비좁음을 알아차리는 아이의 총명함이, 먼 옛날 문자를 발명한 중국의 전설적인 성인 창힐의 권위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아이의 총명함이 어른을 굶겨 죽이는 통쾌함은 이렇듯 어른의 비밀에 무심한 아이와 아이의 총명함을 껴안는 어른 사이의 따뜻한 네트워크에서 가능해지는 것은 아닐까. 물론 아이들은 예전보다 훨씬 똑똑하고 눈치 빠르고 민첩해졌다. 그러나 '미디어'를 태반으로 삼아 TV와 컴퓨터 게임과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친구로 삼은 오늘의 아이들은, 과연 18세기 서당에서 농땡이를 치던 저 연암 시절의 아이들보다 행복해졌을까.
53p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자유로워졌다. 조금 '위험한'책을 읽는다고 해서 검열을 받아 체포되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 배낭여행을 떠날 수 있으며, 조국의 눈치를 보며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우리의 20대들은 과연 그때보다 행복해졌을까. 자본과 문명이 약속한 장밋빛 미래는 혹시 인터넷 게임이나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거대한 판타지는 아니었을까. 우리는 미디어의 판타지를 '보기만'하면서 실제로 '누리는'듯한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해방된 조국에서 얼마든지 신나게 연애하며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인터넷 화면 안에 둥지를 튼 연예인 관련 뉴스나 주가 폭락 소식에 하루 종일 붙들려 있는 오늘의 삶은 왜 이리 갑갑할까. 청춘의 근거는 나이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하여 운명과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99p 아직 나 역시 속독의 유혹, 다독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경험으로부터 얻은 유일한 진실은 나에게 좋은 책일수록 속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진정 아름다운 작품은 요약 불가능하다는 것, 요약형 지식과 축약형 정보는 우리의 삶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 또한 평범한 진실이지만, 화려한 유비쿼터스 시대에 잊기 쉬운 진실이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빨리 읽히는 책'을 거부하게 되었다. 우리는 남의 글은 빨리 읽기를 바라고 자신의 글은 천천히 읽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진정한 타인을 만나는 길은 '소통 불가능한 타인의 사유의 문(門)'을 향해 지치지 않고 노크하는 길밖에는 없는 듯하다. 그래서 내가 택한 길은 미련하게, 답답하게 한 권의 책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다. 내가 사랑한 책들은 나의 지저분한 메모로 가득 차서 '행간'이 거의 지워질 듯 너덜너덜해졌다. 내 책에 묻은 손때와 지저분한 메모들이야말로 대답 없는 타자를 향한 나의 지독한 외사랑의 방식이다. 아직 내 사랑의 방식은 이렇게 남루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꾀죄죄한'사랑의 방식이 속독과 다독을 향한 내 오랜 강박을 치유해 주었다는 점이다. 지식의 분량을, 똑똑한 사람의 '분위기'를 사랑했던 내가, 이제는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18p 일찍이 폴 오스터는 책과 독자 사이의 일 대 일의 관계를 <월드가이드>와의 인터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 적 있다. "'문학'이 가진 흥미로운 점 하나는, 예를 들어 영화와 비교했을 때, 언제나 단 한 사람이 단 한 권의 책과 조우한다는 것이죠. 즉 항상 일 대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 작가이고, 당신이 그 독자이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어느 한 페이지 위에서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그곳이, 내 생각에는 인간의 의식들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친밀하고 은밀한 장소입니다. 자신이 모르는 이방인의 의식 속으로 잠입해 우리 인간의 공통적 휴머니티를 발견하는 순간은 오로지 그때뿐입니다. 그래서 문학은 절대로 죽을 수 없는 것이죠." 폴 오스터가 말하는 '문학'을 '책'으로 바꾸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독서는 저자와 독자, 아니 '나'와 '책'이 독대하는,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밀월여행이다.
125p 상상력이 뜻하지 않게 유머를 낳을 수는 있지만, 유머가 상상력을 낳을 수는 없다. 그 어떤 마음의 파문도 일으키지 않는 말초적 유머는 가독성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유머의 첫맛과 뒷맛이 일치하는 유머는 독자의 상상력을 간질이지 못한다. 복잡 미묘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 짠하고도 애잔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는 언제나 감동의 원천기술이다(그래서 나는 아직도 박완서의 걸쭉하고도 새침한 구식 유머가 좋다). 문학의 유머는 <개그콘서트>나 <웃음을 찾는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세상의 모든 역사와 세상의 모든 억압과 경쟁한다. 문학적 유머의 원천기술은 의미를 삭제한 쾌락이 아니라, 의미와 질펀하게 놀아나는 예술과 지성과 상상력의 비빔밥이다.
131p 오르한 파묵의 작품세계는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다채로운 화답의 콜라주로 압축될 수 있다. 푸코는 어떤 인터뷰에서 난데없이 짜증을 부린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등으로 나에게 질문하지 말아주십시오. 언제나 똑같은 채로 있으라는 식으로 질문하지 말아달란 말입니다." 오르한 파묵 역시 이렇게 호소한다. "부디 내게 서양인이 되라, 동양인이 되라 주문하지 말라." 그것은 "나는,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아'와 '적'을 가르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며, "Who are you?" 라는 질문 자체에 녹아 있는 정치적인 폭력성을 겨냥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얀 성]의 주인공 '나'는 나를 나이게 하는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를 꿈꾼다. 나를 평생 동안 '나답게'만 살아달라 주문하는 정체성의 그물이야말로 폭력이며, 모두이면서도 그 누구도 아닐 수 있는 자유야말로 작가의 생명일 것이다.
188p 미국은 정말로 인류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들이 타인의 고통에 개입하는 방식은 미국 드라마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과학수사대처럼 왜 늘 '사후적'인 것일까. 그들은 왜 모든 사건이 일어난 후에, 범죄나 재난이 이미 일상을 파괴한 후에 나타나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는 것일까. 진정 훌륭한 경찰이라면 '일상'에서 더 이상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개입하고 예방하는 프로그램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미국 드라마의 경찰들은 위대한 해결사의 역할을 자임하지만, 그드르이 모든 대단한 개입은 항상 '사후'에 이루어진다. <CSI>의 모든 첫 장면은 '이미'살해된 시체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사건이 일어난 후 현장에 나타나 그들의 권력을 행사하고 확인하는 퍼포먼스를 실현한다. 진정한 권력은 자신의 권력을 재확인할 필요가 없다. 진정한 권력이 있다면 범죄를 해결함으로써, 아니 범인을 색출해냄으로써 자신의 권력이 건재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 자체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노력을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빈곤과의 싸움이고 질병과의 싸움이며 모든 차별과 고통과의 싸움일 것이다.
194p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이 가장 많이 토로하는 고민 중 하나가 '과연 나에게 재능이 있을까'하는 의혹이다. 우리의 예술 교육은 군계일학의 천재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알록달록한 재능을 가진 수많은 아이들의 기를 죽여온 것은 아닐까. 나 또한 예술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의 배타적 영역이라는 선입견에서 오랫동안 벗어나기 어려웠다. 문학을 사랑했지만 '감히'작가의 꿈을 꿔보지 못한 이유도 '내게는 재능이 없다'는 절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수업을 함께하는 학생들에게 '감히'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재능은 광에서 곶감 꺼내먹듯 정해진 분량을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고. 재능은 뜻밖의 타인과의 부딪힘을 통해, 알 수 없는 세계와의 충돌을 통해, 감당할 수 없는 사건과의 조우를 통해 매일매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제련되고 폭발하고 잉태되는 것이라고. 재능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 무구한 집중에서, 낯설고 어이없는 타인을 만나 그를 미치게 사랑하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나 아닌 나'를 향해 질주하는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재능을 발견하지 않으려는 아집과 태만에 있는 것이지 재능의 유무 자체가 아니라고. 누구도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발견하는 재능을 가질 순 없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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