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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독서/한 권의 책

인간에게 이야기는 본능이야

'인간에게 이야기 취향은 본능적이다'

 

 말 그대로, 옛날옛적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이야기를 원하며 이야기에 파묻혀 살고 있다. 신화, 전설, 민담의 시대를 거쳐 소설, 연극, 영화, 드라마, 만화, 각종 뉴스들, 찰나의 광고 속에도 이야기가 숨어 있는 시대. 그 중 김용석은 [서사 철학]에 신화, 대화, 진화, 동화, 혼화(애니메이션 작품을 가리키는 말로 저자가 만든 단어), 만화, 영화 일곱 가지 텍스트를 선정하여 일곱 무지개의 신 아이리스Iris를 데리고 나와 '이야기 탐구의 아이리스'라 부제를 붙인다.

 

나는 일곱 가지 특색을 지닌 장르에 대한 연구로 구성된 이 책이 '이야기 탐구의 아이리스'이기를 바란다. 고대 신화에서 무지개의 여신 아이리스는 날개를 달고 얇은 베일을 쓴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이 베일은 햇빛을 받으면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을 띠었다. 아이리스는 무지개를 상징하지만. 좀더 넓게는 무지개가 나타내듯이 하늘과 땅의 결합 내지 천상의 신과 지상에 사는 인간의 연계를 상징한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상징을 더 붙이고 싶다. 무지개는 자연 현상 가운데서 매우 독특하게 '구성된' 것이다. 햇빛과 물방울이 절묘하게 만나 구성된 '아이리스의 베일'은 자연의 '허구'이다. 거기에는 미련이 남을 수밖에 없는 지고의 아름다움과 영원을 보장받은 순간적 감동과 소멸이 임박한 환희의 비극성이 있다. 누구든 이 책에서 이야기를 위한 '아이리스의 베일'을 찾아낸다면, 지난한 작업에 대한 값진 보상이 될 것이다.(저자의 말 중에서)

 

거의 700쪽 가까이 되는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저자의 말처럼, 독자에 따라 책 속에서 찾아낼 아이리스의 베일의 색은 서로 다를 것이다. 그 중 내가 찾아낸 이야기는, 이것이다.

 

220p 소크라테스는 '아름답게'살려고 노력했다. 그의 삶은 인생이란 하루하루의 행동으로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것과 같음을 가르쳐주었다. 그가 지혜를 사랑하며 사는 삶이 아름답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범인은 인생을 경험하며 살고, 철인은 인생을 구상하며 산다. 그것도 아름답게 구상하며 산다.
철학은 인생을 이야기처럼 살아가게 해주는 힘이다.(2부 '대화' 중에서)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어내려가며 저자가 이끌어낸 결론을 읽다가,

갑작스레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이 몰려왔다.

 

시험 결과를 확인한 뒤였다.

 

나의 일 년이 소리없이 구겨진 뒤,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는가 라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수험생이라는 이름은 쓸쓸하다. 고독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 요즘 들어서는 세계와의 싸움까지, 이름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어둠은 깊어지고 무거워져만 간다. 여기에 바치는 이 시간들에 의미가 있을까?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건 아닐까? 나를 쳐다보는 저 눈빛들, 나를 비웃는 것만 같고, 나를 내리누르는 이 세계에, 나를 위한 신은 없다.

 

그러나 이제는 조심스레 말할 수 있다. 이야기하는 삶,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거대한 한 편의 이야기를 쓰는 것, 나는 지금 이야기를 쓰는 중이다. 나를 이기고, 세계에 우뚝 서서 새로운 나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대 서사시를 쓰는 중이다. 드라마로 말하면, 청춘성장드라마?ㅋ정도 되겠다. 그 쓰여지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주인공이자 작가다. 이 중요한 역할을 맡은 내게 헛된 존재라 말할 자 누구인가? 이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완성하기까지 나는 집필을 포기하지 않으련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앞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최종적으로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사랑하며 사는 삶을 위해.

 
ㅡㅡㅡ
그 외 메모한 문장들

56p 에코가 소설 쓰기는 '우주론적 과제'라고 한 것도 이런 의미에서 한 말이다.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의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그 세계의 구성 요소들을 구상해야 한다. 문제가 제기되고 문제 풀이의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하면 '말 되는'이야기는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 다시 말해 따라올 수밖에 없게 된다. 에코가 역설적으로 말하듯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지어가기 위해서는 강제조건을 창조해야"한다. 그 조건이 바로 서사를 위한 '세계 구상'인 것이다.

97p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아와 인간 정체성에 대한 질문, 바로 이것이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비극에 이르기까지 고대 서사의 핵심이며, 지난 수천 년 동안 서구 역사에서 있었던 모든 이야기의 기초 유전자인 것이다.

130p 서사철학은 이야기 탐구로 이야기 창조에 기여하는 문화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에 앞서 서사철학은 이야기를 실재처럼 탐구한다. 이야기는 존재의 비밀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사철학의 문화적 역할 수행에는 항상 이런 기본 정신이 깔려 있다. 그 기본 정신에는 실용적 측면도 있다. 그것은 이야기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여 그 결과로 철학의 현실화를 꾀하는 일이다. 이때 현실화란 과거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삶의 '문제'들 가운데서(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문제를 생산하기 때문이다)어떤 것들이 미래세계에서도 '문젯거리'가 될 수 있는지 탐색하는 일이다. 이와 함께 그것에 대한 가상적 해결을 사유 시험할 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우주와 사물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오늘 우리의 성찰을 풍부하게 한다. 이는 철학이 이야기를 통해 젊음을 유지하고 세상에 신선한 사유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이다.

220p 소크라테스는 '아름답게'살려고 노력했다. 그의 삶은 인생이란 하루하루의 행동으로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것과 같음을 가르쳐주었다. 그가 지혜를 사랑하며 사는 삶이 아름답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범인은 인생을 경험하며 살고, 철인은 인생을 구상하며 산다. 그것도 아름답게 구상하며 산다.
 철학은 인생을 이야기처럼 살아가게 해주는 힘이다.

329p 짐멜은 희극적인 것과 비극적인 것을 우연과 필연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겉으로 보기에 필연적인 것이 내재적 우연의 결과라면 그것은 희극이다. 반면 겉으로 보기에 우연적인 것이 내재적 필연성에 지배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비극의 특성은 우연처럼 보이는 모든 사건에 사실 필연성이 철저하게 내재한다는 데 있다. 비극성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필연적 조건을 의식하는 데 있다. 나아가 결국 필연적 운명이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있겠구나'하고 인식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비극은 단순히 슬프고 절망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근원적이고 포괄적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기회이다.

423p 자기 인식의 자기, 또는 서사적 정체성으로서 자기는 자기 삶의 독자인 동시에 필자로 구성되어 나타난다.

467p 세상은 이제 더 이상 대문자로 쓰여진 유아독존의 현실(The reality)이 아니라, 어떤 개개의 현실(a reality)이 모여서 '현실들(realities)'을 구성하는 세계가 되었다. 그래서 '현실들 사이'에 '환상들'이 자리를 잡기도 하고, 그 사이를 환상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통풍효과'를 낼 수도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현실은 이제 그 자체로 현란한 '복잡계'를 이룬다. '현실들의 복잡계'는 대문자의 현실이 세상의 변방으로 귀양 보냈던 환상의 요소들을 그 사이 사이에 다시 불러들여 '같이 놀자'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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