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거장과 마르가리타

 이틀 만에 600페이지를 먹어치웠다. 이렇게까지 술술, 길고 긴 러시아 이름도 거슬리지 않고, 소설 뒤쪽의 주석을 찾아보는 것조차 즐거울 정도로, 이렇게까지 재미있는 소설일 줄이야! 꿈을 꾸듯 넘어가는 페이지들.
  환상소설이지만 그 환상은 결코 허무맹랑한 백일몽이 아니다. 불가코프의 환상은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없는 소비에트 사회의 억압 속에서 몰래 내쉬던 절박한 한 줄기의 숨이다. '권력은 인간에 대한 폭력'이라는 진리를 말한 죄로 기둥에 매달린 예수아와 예르살라임이, 약 2000년 뒤 예수와 빌라도에 대한 글을 쓴 죄로 박해를 받은 거장과 모스크바가 겹쳐지고, 그 사이에 볼란드, 검은 마술로 모스크바를 한바탕 휘젓는 악마가 등장한다. 악마라고는 해도 폭력적이고 암울한 악이 아닌, 오히려 볼란드의 부하들, 아자젤로나 코로비예프, 고양이 베헤못과 뱀파이어 헬라 등 매력적인 악당들로 그들이 부조리한 소비에트 사회의 어둠을 고발하는 모습은 읽으면서 속이 시원해졌다. 진짜 악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빛을 비출 때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아닌, 사람 안에 숨겨진 탐욕과 이기심인 것을. 사람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악이다. 그 악이 불가코프의 원고를 태우려 했고, 필사적으로 지켜낸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결국 살아남았다. 후대 사람들로서 정말 다행스럽고, 존경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저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입니다. 만일 신이 없다면, 그렇다면 누가 인간의 삶과 이 지상의 모든 질서를 주관하지요?"
"인간이 직접 하지요."사실, 그렇게 단순하다고는 할 수 없는 그 질문에 베즈돔니는 화를 내듯 성급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면," 낯선 자는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그러러면 일정 기간, 그러니까 적어도 어느 정도의 기간에 대해서는 정확한 계획을 세울 수 있어여 합니다. 그런데 웃음이 나올 만큼 짧은 기간, 글쎄, 한 천 년이라고 해두지요. 그 짧은 기간에 대해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내일 당장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조차 장담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인간의 삶과 지상의 모든 질서를 주관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죄수가 말했다. "모든 권력은 인간에 대한 폭력이며, 카이사르들의 권력도, 그 외의 다른 어떤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인간은 그 어떤 권력도 필요 없는 진리와 정의의 왕국으로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니까. 원고는 불타지 않소."


'...........가장 큰 악덕은............비겁함이다.


"만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의 선은 무슨 일을 하게 될까? 또, 만약 이 지상에서 모든 그림자들이 사라진다면, 그때 지상의 모습은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림자는 사물과 인간들로부터 만들어지지. 여기 내 검의 그림자처럼.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은 나무와 살아 있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너는 지구 전체를 벗겨버리려고 하고 있어! 벌거벗은 빛을 즐기려는 너의 환상으로 이 지상의 모든 나무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벗겨내버리고 싶은 건가? 너는 어리석어."


'미친독서 > 소설의 그림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릭 오르세나의 두 해 여름  (0) 2008.12.30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0) 2008.12.30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0) 2008.12.16
금빛 잉어의 꿈  (0) 2008.12.12
권여선의 단편집, 처녀치마  (0) 2008.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