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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독서/소설의 그림자

권여선의 단편집, 처녀치마

 [푸르른 틈새]와 [분홍 리본의 시절]사이, 불안하면서도 언뜻 드러나는 날카로운 언어들.

- 털실이 풍실풍실하게 감긴 실패처럼 젊은 날의 내 자아는 바쁜 생활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그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실을 다 풀어내고 나면 자아의 꽃씨가 일찍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떤 놀랍고 화려한 처녀를 꽃피워놓았을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처녀치마>

- 사람이 얼마나 고귀해져야 자신의 비천함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는가.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마저 속일 수 있게 되는가. <두리번거린다>

- 나는 내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았던 적이 없다. 내 마음은 늘 어딘가로 가고 싶어 했고 쉼 없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이었지만 나는 번번이 중도에 그 어딘가를 놓쳐 몽유병자처럼 망연해지곤 했다. <수업 시대>

- 일찍이 그렇게 배웠다.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한두 번의 연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만물은 유전한다고, 모든 것은 흔적 없이 움직이다 사라질 뿐이라고. 그녀는 규와 그에게 시선을 못 느끼면 배우로서 임포라 가르쳤다. 역사의 시선을 외면하면 역적이라 가르쳤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만의 시간들을 살고 있다. 그들도 유전한 것이다.
<그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