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0 흥취를 지닌 시는 어떤 시인가. 그것은 투철하고도 영롱하며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엄우는 이를 다시 몇 가지 비유로 제시한다. 공중지음, 상중지색, 수중지월, 경중지상이 그것이다. 허공에 울려 퍼지는 소리나 형상 속에 깃들어 있는 미묘한 색채, 물속에 찍한 달, 거울 속의 형상은 모두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물속의 달은 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흔들려 사라지고 만다. 달의 실체는 하늘에 떠 있고, 물은 그 실체를 투영할 뿐이다. 공중으로 퍼져가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은 어떤가. 다만 짠맛으로 소금이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을 뿐, 만지거나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다. 흥취 또한 이와 같다. 시인의 정신은 저만치 허공에 떠 있고, 언어를 통해 수면 위에 그 정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다. 한 편의 훌륭한 시는 독자에게 느껴서 알게 할 뿐, 따져서 납득시키려 들지 않는다.
p43 화가가 그리지 않고 그리는 방법과 시인이 말하지 않고 말하는 수법 사이에는 공통의 정신이 있다. 구름 속을 지나가는 신룡은 머리와 꼬리만 보일 뿐 몸통은 다 보여주지 않는다. "한 글자도 덧붙이지 않았으나 풍류를 다 얻었다."는 말이 있다. 또 "단지 경물을 묘사했는데도 정의情意가 저절로 드러난다."고도 말한다. 요컨대 한 편의 훌륭한 시는 시인의 진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상을 통한 객관적 상관물의 원리로써 독자와 소통한다. 시인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건네는 대신, 대상 속에 응축시켜 전달한다. 그래서 "산은 끊어져도 봉우리는 이어진다."는 말이 나왔다. 지금 눈앞에 구름 위로 삐죽 솟은 봉우리의 끝만 보인다 해서 그 아래에 봉우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와 같이 시 속에서는 "말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구름 위에 솟은 봉우리의 끝뿐이지만,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니다. 시인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구름 아래 감춰져 있다.
1920년대 이미지즘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시의 작법>이란 시에서 "시는 의미해서는 안 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 "시는 사실 그 자체를 진술해서는 안 되고 등가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시는 이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의경을 전달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p140 미당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 시인에게 한국의 대표시로 소개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국화하면 "도리야 곶이온 양 마라, 임의 뜻을 알괘라."라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처럼 추위를 아랑곳 않는 매운 절개를 상징하는 꽃으로 배워왔다. 그러기에 "머나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라는 시인의 언급은 이것의 자연스런 변용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프랑스에서 국화는 장례식 때나 쓰는 '죽음'을 의미하는 꽃이다.
그러고 보면 그 프랑스 시인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문장을 "봄부터 죽음을 예감하고 소쩍새가 울었다."는 의미쯤으로 받아들였을 법하다.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에 이르러서는 여름까지 지속된 자살의 충동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여기에서 무슨 감동이 피어나겠는가.
p288 문학은 득의가 아닌 실의에서 나온다. 아무 아쉬울 것 없는 왕공 귀인들은 문학에 목숨 거는 일이 거의 없다. 그들에게 무낙은 치장이나 나머지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낙척한 떠돌이와 불우한 재야의 문인에게 문학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수단이다. 이인로가 말했다.
- 천지는 만물이 다 좋게만 하는 법이 없다. 뿔 있는 놈은 이빨이 없고, 날개가 있으면 다리가 두 개뿐이다. 이름난 꽃은 열매가 없고, 채색 구름은 쉬 흩어진다. 사람에 이르러서도 그러하다. 기특한 재주와 화려한 기예가 뛰어나면 공명이 떠나가서 함께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치가 그러하다. -
문장도 훌륭하고 공명도 함께 누리는 이치는 없다. 뿔을 가지려면 이빨을 포기하든지, 꽃이 아름답거든 열매의 내실을 기대할 수 없다. 날개를 단 채로 다리도 네 개이기를 바라거나, 채색 구름의 영롱한 자태가 길이 변치 않기를 바랄 수는 없다.
라이오넬 트릴링은 "현대의 문화인은 정치적으로는 부와 쾌락을 원하면서 예술적, 실존적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쾌락을 거부하고 프로이트식으로 말해 반쾌락에서 만족을 찾는 본능적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충동은 시대를 떠나 늘 존재해왔다. 모든 것이 갖춰진 넉넉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 입을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속에 이른바 정서란 것이 생겨난다. 그것이 슬픔과 분노, 격정과 눈물이 되어 터져 나온 것이 바로 시이다.
p498 달사와 속인을 가르는 경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에 대해 김택영은 <수윤당기>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 천하에 이른바 도술과 문장이라는 것은 부지런함으로 말미암아 정밀해지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진실로 능히 깨닫기만 한다면 예전에 하나를 듣고 하나도 알지 못하던 자가 열 가지 백 가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전에는 천만 리 밖에 있던 것을 바로 곁에서 만나 볼 수 있게 되고, 지난날 어근버근하여 알기 어렵던 것이 매끄럽게 쉬 이해된다. 예전에 천만 권의 책에서 구하던 것을 한두 권이면 충분하게 되고, 전에는 법이 어떻게 판결이 어떻고 하던 자가 이른바 법이니 판결이니를 말하지 않게 된다. 그렇지만 이를 깨닫는 법은 방향도 없고 형체도 없다. 손으로 쥘 수도 없고 무어라 규정할 수도 없다. 예전에 성련이란 사람은 파도가 넘실대는 것을 보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도를 깨달았다. 성련이 이렇게 해서 깨달았다고 하여, 가령 어떤 사람이 성련의 일을 사모하여 거문고를 안고 파도가 넘실대는 곳에 서 있다면 어떠하겠는가? 대저 성련의 깨달음은 여러 해 동안 길이 생각한 결과 이루어진 것이지 하루아침 사이에 까닭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
좋은 책은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
훌륭한 책은 성장에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훌륭한 책을 만난 뒤의 느낌이, 내가 독서를 끊지 못하도록 만드는 마약이다.
한시의 미학을 깨우치게 하여 진정한 문학에의 길에의 욕구를 일깨워준 이 책을
이제라도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한다.
p43 화가가 그리지 않고 그리는 방법과 시인이 말하지 않고 말하는 수법 사이에는 공통의 정신이 있다. 구름 속을 지나가는 신룡은 머리와 꼬리만 보일 뿐 몸통은 다 보여주지 않는다. "한 글자도 덧붙이지 않았으나 풍류를 다 얻었다."는 말이 있다. 또 "단지 경물을 묘사했는데도 정의情意가 저절로 드러난다."고도 말한다. 요컨대 한 편의 훌륭한 시는 시인의 진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상을 통한 객관적 상관물의 원리로써 독자와 소통한다. 시인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건네는 대신, 대상 속에 응축시켜 전달한다. 그래서 "산은 끊어져도 봉우리는 이어진다."는 말이 나왔다. 지금 눈앞에 구름 위로 삐죽 솟은 봉우리의 끝만 보인다 해서 그 아래에 봉우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와 같이 시 속에서는 "말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구름 위에 솟은 봉우리의 끝뿐이지만,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니다. 시인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구름 아래 감춰져 있다.
1920년대 이미지즘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시의 작법>이란 시에서 "시는 의미해서는 안 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 "시는 사실 그 자체를 진술해서는 안 되고 등가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시는 이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의경을 전달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p140 미당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 시인에게 한국의 대표시로 소개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국화하면 "도리야 곶이온 양 마라, 임의 뜻을 알괘라."라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처럼 추위를 아랑곳 않는 매운 절개를 상징하는 꽃으로 배워왔다. 그러기에 "머나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라는 시인의 언급은 이것의 자연스런 변용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프랑스에서 국화는 장례식 때나 쓰는 '죽음'을 의미하는 꽃이다.
그러고 보면 그 프랑스 시인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문장을 "봄부터 죽음을 예감하고 소쩍새가 울었다."는 의미쯤으로 받아들였을 법하다.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에 이르러서는 여름까지 지속된 자살의 충동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여기에서 무슨 감동이 피어나겠는가.
p288 문학은 득의가 아닌 실의에서 나온다. 아무 아쉬울 것 없는 왕공 귀인들은 문학에 목숨 거는 일이 거의 없다. 그들에게 무낙은 치장이나 나머지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낙척한 떠돌이와 불우한 재야의 문인에게 문학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수단이다. 이인로가 말했다.
- 천지는 만물이 다 좋게만 하는 법이 없다. 뿔 있는 놈은 이빨이 없고, 날개가 있으면 다리가 두 개뿐이다. 이름난 꽃은 열매가 없고, 채색 구름은 쉬 흩어진다. 사람에 이르러서도 그러하다. 기특한 재주와 화려한 기예가 뛰어나면 공명이 떠나가서 함께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치가 그러하다. -
문장도 훌륭하고 공명도 함께 누리는 이치는 없다. 뿔을 가지려면 이빨을 포기하든지, 꽃이 아름답거든 열매의 내실을 기대할 수 없다. 날개를 단 채로 다리도 네 개이기를 바라거나, 채색 구름의 영롱한 자태가 길이 변치 않기를 바랄 수는 없다.
라이오넬 트릴링은 "현대의 문화인은 정치적으로는 부와 쾌락을 원하면서 예술적, 실존적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쾌락을 거부하고 프로이트식으로 말해 반쾌락에서 만족을 찾는 본능적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충동은 시대를 떠나 늘 존재해왔다. 모든 것이 갖춰진 넉넉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 입을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속에 이른바 정서란 것이 생겨난다. 그것이 슬픔과 분노, 격정과 눈물이 되어 터져 나온 것이 바로 시이다.
p498 달사와 속인을 가르는 경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에 대해 김택영은 <수윤당기>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 천하에 이른바 도술과 문장이라는 것은 부지런함으로 말미암아 정밀해지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진실로 능히 깨닫기만 한다면 예전에 하나를 듣고 하나도 알지 못하던 자가 열 가지 백 가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전에는 천만 리 밖에 있던 것을 바로 곁에서 만나 볼 수 있게 되고, 지난날 어근버근하여 알기 어렵던 것이 매끄럽게 쉬 이해된다. 예전에 천만 권의 책에서 구하던 것을 한두 권이면 충분하게 되고, 전에는 법이 어떻게 판결이 어떻고 하던 자가 이른바 법이니 판결이니를 말하지 않게 된다. 그렇지만 이를 깨닫는 법은 방향도 없고 형체도 없다. 손으로 쥘 수도 없고 무어라 규정할 수도 없다. 예전에 성련이란 사람은 파도가 넘실대는 것을 보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도를 깨달았다. 성련이 이렇게 해서 깨달았다고 하여, 가령 어떤 사람이 성련의 일을 사모하여 거문고를 안고 파도가 넘실대는 곳에 서 있다면 어떠하겠는가? 대저 성련의 깨달음은 여러 해 동안 길이 생각한 결과 이루어진 것이지 하루아침 사이에 까닭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
좋은 책은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
훌륭한 책은 성장에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훌륭한 책을 만난 뒤의 느낌이, 내가 독서를 끊지 못하도록 만드는 마약이다.
한시의 미학을 깨우치게 하여 진정한 문학에의 길에의 욕구를 일깨워준 이 책을
이제라도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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