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우리를 아는 사람이 몇명이나 있을까요?" 대뜸 외할머니가 물었다. 외할머니는 다시는 찾아가지 않은 고향집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고향집 마룻바닥과, 해바라기가 열 그루나 있던 마당과, 소용돌이를 그리며 물이 빠지던 수챗구멍에 대해. "전 다 기억하는데 고향에는 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외할머니는 잠자리를 잡다 넘어져 다친 무릎의 상처는 아직도 그대로라고, 심지어 아직까지 그 상처가 가렵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일곱 살 때 다친 상처인데도 그래요. 그런데.....전, 우리 가족에겐 죽은 사람일까요?" 할머니는 큰삼촌이 중학생이었을 때 종아리를 때린 적이 있는데 자꾸 그 기억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단지 수학시험을 못 봤을 뿐이었어요." 할머니는 목이 메어왔다. 외할머니는 할머니가 실컷 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났다. 코 푸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사돈 아직 거기 있어요? 하고 할머니가 물었다. "그래요, 여기 있어요."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아침이 될 때까지 이야기를 했다. 큰삼촌이 얼마나 늦게 걸음을 걷기 시작했는지, 어머니가 얼마나 늦게까지 젖을 먹었는지에 대해. "잊지 마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기억하는 거예요." 전화를 끊기 전에 외할머니가 말했다.
- 윤성희 [구경꾼들]
세계는 이야기로 창조되었다고 저는 믿고 있어요. 이야기로 만들어지고 흩어졌다가 다시 태어나고...를 무한히 반복하면서 지금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그 중에서 최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잡아 보존액을 발라 책에 담아내는 중요한 임무를 문학이 담당한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기억하는 것. 여기 여덟 명의 가족이 찍힌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이 사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끄집어 낼 수 있을까요? 쉼 없이 계속되는 이야기 릴레이에 산만함을 느낄 수도 있고, 명확한 시작도 끝도 없는 이 소설에 실망감을 맛보는 사람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게 바로 진짜 이야기의 성격 아닐까요? 적어도 전 풍성한 이야기의 향연에 너무나도 행복해졌답니다.
'미친독서 > 소설의 그림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찾은 민음사판 토마스 만 단편집 (0) | 2011.03.14 |
---|---|
희망 없이 인간은 고난을 이기지 못한다 (0) | 2011.02.05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0) | 2011.01.16 |
스티븐 킹의 사계 재출간 (0) | 2011.01.04 |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0) | 2011.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