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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독서/한 권의 책

한스 요하임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

천 쪽이 넘는 두툼한 지적 자산을 완독한 나 자신에게 경의를...ㅋ

138p 사람의 정신과 마음이 바로잡히려면, 무엇보다 사물들이 단순하고 올바른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공자에 따르면, 이름과 개념이 혼란스러워지는 것만큼 평화와 정의와 복리를 해치는 것은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로, 아들은 아들로, 제후는 제후로, 신하는 신하로 불릴지어다! 이것이 올바른 통치의 비결이다. 권력을 잡는다면 제일 먼저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공자는 대답했다. 당연히 개념들부터 바로잡겠노라고! 공공 생활이 제기하는 절박한 과제들의 홍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개념부터 바로잡겠다는 공자의 말이 다소 엉뚱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현대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주의', '침략', '노예제'와 같은 개념이 본래의 의미에서 분명하게 사용되고 온갖 선전과 구호에 의해 자행되는 왜곡이 저지되기만 한다면, 혼란스런 오늘날의 세계 정세가 얼마나 더 단순하고 투명해질 것이며, 수백만의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기가 얼마나 더 쉬워질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82p 고대의 전설에 따르면, 탈레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가장 쉬운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남에게 충고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 밖에 신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시작과 끝이 없는 무엇"이라 답했고, 어떻게 해야 완전한 덕을 갖춰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타인이 행하면 잘못됐다고 비난할 만한 일을 스스로 저지르지 말라"고 대답했다.

519p 라이프니츠의 확신에 따르면 신은 창조 행위에서 모든 가능한 세계 중 최상의 세계를 마련했다. 이는 신의 본질에서 당연하게 도출되는 결론이다. 만약 창조된 세계가 최상의 세계가 아니며 더 나은 세계가 존재한다면, 신은 더 나은 이 세계를 알지 못했거나-이는 신의 전지함과 모순된다-창조할 능력이 없었거나-이는 신의 전능함과 모순된다-창조할 의지가 없었다는-이는 신의 지선함과 모순된다-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세계 중 가장 완전한 이 세계에서 고통과 불완전함과 죄악이 넘쳐나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이 다루는 문제이다.

651p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너 자신을 알라!"이다. 물론 이는 '네 신체적 완전성'을 추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네 의무, 즉 네 마음과 관련해서 도덕적 완전성'을 추구하라는 뜻으로, 네 마음이 '선한지 악한지'를 알라는 것이다.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은 마음의 심연으로 파고들 것을 요구하는 도덕적 자기인식은 모든 인간의 지혜가 시작되는 근원이다."

747p 포이어바흐는 종교의 발생을 인간의 본질, 즉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주의로부터 설명하려 했다.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상상력과 감정 때문만이 아니라 행복해지려는 욕구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이 소망하지만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않은 상태가 자신의 신에게서 실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신이란 실재한다고 생각된 인간의 소망, 현실적 존재로 변이된 인간의 소망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소망이 없었다면, 상상력이나 감정의 작용에도 불구하고 종교나 신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마다 소망이 각양각색이듯 종교도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자연은 인간의 소망 충족을 여러 모로 방해한다. 이 때문에 인간은 자신과 유사하고 자신을 사랑하며 자연의 맹목적 필연성을 초월하는 어떤 존재를 떠올려 위안을 얻고자 한다. "천국의 보호라는 지붕 아래서 돌아다닌다는 것은 얼마나 쾌적한 일이며, 불신자들처럼 가차 없는 자연의 운석과 우박과 호우와 햇살에 직접 노출된다는 것은 얼마나 괴롭고 절망적인 일인가."
 그러나 이처럼 상상의 종교에서 소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인류의 유치한 꿈일 뿐이다. 인간은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종교에 의해 오직 상상에서만 얻었던 것을 자신의 힘으로 직접 현실에서 획득해야 한다. 이럴 때에야 인간의 자연의 야만성과 맹목적 우연성에서 해방된 아름답고 행복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런 목표에 도달하려면 교양과 문화에 의해 자연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793p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진정한 삶의 문제란 언제나 실천적인 개별문제의 유형이라고 보았다. 즉 '인간 일반은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특정한 인간인 내가 이 순간의 특정한 상황에서 이러저러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가 참된 문제이다. 이는 '실존적인'문제이다. 철학이 의미를 가지려면 바로 이런 문제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객관적 사유는 주체와 그 실존에 무관심하지만, 실존적 존재로서의 주관적 사상가는 자신의 사유에 관심을 가지며 그 사유에서 실존한다.", "실존과 본질적 관계를 맺는 인식만이 본질적 인식이다."

906p 사르트르는 야스퍼스나 하이데거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플라톤 이래의 철학 전통과 달리 그는 인간을 존재가능성들이 미리 확정된 존재로 간주하지 않는다. 사물은 어떤 무엇이지만, 인간은 그런 의미에서의 어떤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우선은 무無이다. 인간은 말하자면 이러한 무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창조를 거듭하는 가운데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 인간은 "자유라는 선고를 받았다." 이러한 주장 때문에 사르트르는 허무주의자란 비난을 들었다. 독자도 알 수 있듯, 이런 비난이 완전히 부당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유롭다. 이로부터 사르트르의 철학은-카뮈의 요구를 수용해서-두 번째 과제로 나아가게 된다. 그것은 '적극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과제이다. 인간은 세계 내에서 '참여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에서 가치를 정립할 수 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세계에서 나의 행위는 자고새들을 내쫓듯 가치들을 쫗아 버린다." 인간의 자기실현은 '자유로운 기투(내던짐)'를 통해 이뤄진다. 물론 인간이 무에서 헤쳐 나와도 무는 호시탐탐 인간을 노린다. 인간의 자유는 어느 순간에라도 경화되거나 단순한 존재자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무를 무화한다Das Nichts nichtet."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이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무화하다neantiser'라는 새로운 불어동사를 만들었다.
 따라서 사르트르에게 가치란 고유한 존재를 갖지 못하며-우리가 그것을 추구하든 그렇지 않든-무시간적으로 타당할 수도 없다. "나의 자유만이 가치의 근거를 정립한다."
 사르트르의 사상은 인간에게 극도의 책임을 지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도약으로, 이를테면 자신의 머리채를 붙잡고서 무에서 빠져나와야 하며 무의 지속적 위협을 막아 내야 한다. 인간은 홀로 책임을 지며 그 밖의 누구도, 특히 신은 그를 돕지 못한다(사르트르는 무신론자이다). 더욱이 인간은 홀로 자기 자신에만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동시에 타인에게 책임이 있는 존재이다. 하나의 자아와 다른 모든 자아의 불가분한 연관성, 이러한 상호주관성에-그의 희곡작품이 보여 주듯-사르트르의 윤리학이 근거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뤄 볼 때, 사르트르는 그의 사상적 출발점에서부터 사회적, 정치적 생활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이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913p 참된 대화의 전제가 되는 내적 자세에 관해서는 후고 폰 호프만슈탈이 적절하게 서술한 바 있다. "말없이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은 희귀하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참된 독자도 희귀하다. 그러나 가장 희귀한 사람은 타인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 자신의 내적 불안이나 허영, 자기도취 때문에 타인이 주는 인상을 파괴하거나 심지어 무화시키지 않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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